여행을 하다 보면 하루가 어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알차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며, 날짜가 며칠인지도 모른 채 하루 해가 뜨고 진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며 매 순간을 꽉 찬 완벽함으로 만들자는 J 같은 열의에 활활 타오르기도 하지만 대문자 J도 완벽한 하루를 만들기는 어렵다. 언제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며, 현지 상황에 따른 유연함이 즐거운 여행의 척도이다.
그 유연함을 기르는 데에는 약간의 적응기가 필요하다. 상점은 시간표가 있고, 자칫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면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 어렵다. 요일에 따라 휴일이 다 다르고, 특히 일요일엔 마트도 바나 레스토랑도 모두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우리 같은 순례자들은 마을 도착 시간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마트시간을 놓쳐버리면 당장 오늘 먹을 식료품이나 내일의 간식을 살 수 없을 때도 있다. 마트가 있어 감사하지만, 마을마다 구비하고 있는 물건들이 다르고, 작은 마을엔 빈약한 물건들만 있는 데다가 평균 2-3배의 가격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다들 큰 도시를 선호한다. 그곳에는 휴식시간도 없고, 오후 늦게까지 문을 여는 커다란 마트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양한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과 바도 즐비하다.
나 또한 처음엔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부분이었다. 실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숙제는 늘 먹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식을 진심으로 맛있게 하시는 엄마의 딸이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어 보지만, 주변 친구들은 나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먹을지에 대해 언제나 고민을 많이 해야 했다. 까다롭고, 예민한 나와 함께 지금까지 친구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고마움을 이 길 위에서 잠시 전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빵은 빵집에서 하몽과 고기는 정육점에서 과일은 과일가게에서. 매일 새로운 치즈를 먹고, 스페인의 엠부띠또를 종류별로 사 먹고, 지역마다 다른 음식문화를 경험하고 … 하하하.
초보 순례자의 사치였다. 초반에는 느긋하게 진행될 줄 알았으나, 하루하루 지나면서 변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트가 문을 닫았거나, 아예 마트가 없는 작을 마을도 있었다. 레스토랑이 영업 중이었어도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곳은 드물었다. 당연했다. 나는 늘 고르고 비교하며 최고로 맛있으며, 가장 합리적인 가격을 원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순례자 메뉴나 오늘의 메뉴는 어디든 다 비슷했다.
마트가 있는 마을에 머물러도 내일 다시 길을 떠날 나에게 많은 양의 식료품은 필요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먹고 싶은 것들이 있어도 눈을 지긋히 감고 지나쳐야 했다. 혼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을 사야 하니 신중에 신중을 더해 알뜰하게 구입하게 된다. 그러다가 적당히 한 끼를 때우는 날이 길어지면, 욕구불만의 상태로 변해서 한동안 참았던 이드가 꾸물꾸물 올라온다. 그런 날은 그동안 참고 재가며 못 샀던 먹거리들을 마구 사들여서 배 터지게 먹어본다. 인간의 본능은 참으로 단순하며, 강하다. 결국 사고 싶었던 것을 풍성하게 구입해도 혼자서는 다 먹지 못할뿐더러, 많이 산다 해도 순례자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는 기껏 몇 종류만 골라 구매하게 된다. 그래서 길 위의 친구들과 다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는 날은 최고로 신나는 날이 아닐 수 없다.
떠 날 길 위의 간식을 무겁지 않게 구입하는 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자재를 현명하게 구입하는 일,
최적의 레스토랑과 바를 찾아 먹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주는 일, 나의 본능을 살피고 보듬어주며 아껴주는 일. 산티아고 길 위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 건전한 자기애가 아닐까?
오늘의 도착지가 어디냐에 따라 그날의 포만감이 달라지는 까미노. ‘걷다가 너무 지쳤는데 마음에 쏙 드는 마을을 만났을 때, 그곳에 놀랍도록 완벽한 마트가 있고, 알베르게는 쾌적하며 주방까지 사용할 수 있을 때.’ 이런 우연은 흔하지 않다. 나는 완벽이라는 벽을 조금씩 허물기 위해 이 길 위에 올랐는지도 모른다. 주변 상황의 완벽이 아닌 나 자신을 꽉 찬 긍정으로 채우고, 안아주며 나를 마주하는 까미노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