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나를 불렀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여정의 첫걸음이 막을 열었다

by 조란마


정오의 햇살이 광장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초록의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광장 한편엔 일요 시장이 한창이다. 버스는 천천히 플로께 Pl. Floque광장에 멈추었고, 그 어느 때보다 고양된 나는 생장 피에드 포르 Saint-Jean-Pied-de-Port에 첫 발을 내디뎠다. 마치 지구를 방황하다 미지의 우주 공간에 착륙한 사람처럼, 모든 감각이 한순간에 깨어났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여정의 처음이 막을 열었다.


다시 비행기를 타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인생 속의 새로운 챕터를 써나가겠다는 큰 꿈을 안고 스페인으로 요리 유학을 오던 날, 그리고 COVID-19가 전 세계를 강타하던 해. 난 불투명한 미래 속에, 쫓기듯 겨우 구한 비행기표를 들고 야반도주를 감행하여 마드리드 공항으로, 카타르로, 인천으로.. 그리고 그렇게 정체되듯 한동안 한국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수세기 동안 수많은 순례자들을 불러들였던 이 길에 방금 도착했다.


시장의 신선한 치즈와 바삭한 빵의 향이 공기 속을 채우고, 농부와 지역주민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광장을 메운다. 순례자들의 발걸음과 여행자의 시선이 뒤섞인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적인 마을이자 프랑스길의 시작점인 생장은 단순한 출발점이 아니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곳에서는 여행의 이야기가 이어져오고 있다.


IMG_7686.heic
IMG_7680.heic
IMG_7703.heic


‘피레네 산맥 입구에 있는 성 요한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생장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가기 위한 순례자들의 관문이었다. 그리고 요새도시 생장은 북부 순례자들이 피레네를 넘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가장 안전한 길이 되었다.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긴 여정을 위한 각오를 세기고, 마음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는다. 지금의 나처럼 또는 그대처럼.


프랑스 문 porte de france으로 들어서자 시간이 멈춘 듯하다. 성벽 안의 붉은 지붕과 하얀색 건물들이 중세로의 이동을 알린다. 니브강Nive de Béhérobie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니 그 옛날 순례자들의 절실한 기도가 들리는 듯하다. 다리 위 노트르 담 게이트 Notre-dame gate를 지나니 이제 나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숭고한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은근히 흥분된다. '길이 나를 불렀으니 그 이유는 길 위에 있겠지.' 흘러가는 대로 길 위에 몸과 생각을 맡기기로 했다. 이곳에 와야 했던 수많은 이유보다,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날까라는 기대보다, 그저 자유롭게 길 위에서 열리는 나를 마주하고 싶다.


오후 2시에 재 오픈하는 순례자 사무소 앞에는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길 위의 동지들이 모여들었다. 나이, 국적, 배낭의 무게와 옷차림 또한 다양하다. ‘길 위에서 만나요! 당신들과 나의 발걸음을 축복합니다.’

순례자 여권 앞장에 이름과 국적을 썼다. 새 여권의 네모칸 위에 살포시 첫 도장이 찍혔다. 명실공의 찐 순례자가 되었다.


IMG_7669.heic
IMG_7673.heic
IMG_7697 2.heic


프랑스길의 여정이 시작되는 야고보의 문 port de saint-jacque옆에 위치해 있는 55번지 알베르게에 세워둔 배낭 순으로 체크인을 했다. 바스크 지방 전통가옥의 색과 닮아 있는 하얀색 침대보와 붉은색 프레임, 선선한 바람이 넘나드는 창문 옆 2층에 침대를 배정받았다. 오늘의 안식처를 확보했다.


걷는 일이 제일 단순하고 쉽지만, 그 걸음이 쌓이면서 하루하루 변할 모습을 생각하니 그 설렘이 가장 크다. 마을을 산책하며 잠시 묘한 외로움에 휩싸여 가슴이 시렸다. 켜켜이 쌓인 돌길 위의 산티아고 대성당을 가리키는 이정표와 나의 새 신발이 대조적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기대감과 약간의 두려움, 하지만 긍정의 도파민. 생장의 해는 오후 9시가 넘도록 지지 않는다. 내 부푼 마음처럼 여전히 태양 가득 환하다. 8시간 후 피레네 산맥을 향할 내 안의 목소리, 그 속에는 당당함만이 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