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이 된 큰 딸이 묻는다.
"엄마는 아빠 안 보고 싶어?"
"엄마의 아빠? 음... 보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생각은 나지."
"그래? 나쁜 일을 많이 해서?"
"히히. 응 나쁜 일이라기보다는 엄마를 힘들게 했으니까."
"엄마 아빠 이름은 뭐야?"
"정○○. 엄마의 아빠를 외할아버지라고 하는 거야. 외할머니가 있듯이 외할아버지도 있는 거야."
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라는 존재가 궁금해졌나 보다. 질문의 깊이가 깊어진 딸의 성장이 대견하기도 하고, 알게 될 것이 많은 시간 앞에 잊었던 걱정이 떠오르기도 한다. 언젠가 더 자세히, 더 솔직히 알게 될 외할아버지 이야기와 엄마의 가정사를 딸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방영이 끝난 한 드라마를 다시 보는데 어느 한 대사가 마음에 들어왔다.
"사람이 얼마나 보고 싶고 외로우면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걸까?"
어느 언니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동생을 그리워하며 그림을 그렸다. 동생은 나중에 언니가 그려온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도대체 사람이 얼마나 보고 싶고 외로우면 이렇게까지 그릴 수 있었을까?' 미안함에 눈물을 흘리는 동생의 마음이 와닿아 눈물이 났다.
나도 글을 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글을 썼다. 처음에는 일기였고 방학숙제였고 독후감이었다. 그렇게 쓰고 쓰다 삶이 바빠져 잠시 멈추었다. 아이 둘을 출산하고 다시 글을 쓰게 됐다. 이제 글은 내 삶이다. 지금 나는 보고 싶고 외로워서 글을 쓴다기보다 살기 위해서 쓴다. 연약한 내가, 부족한 내가, 부끄러운 내가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서 쓴다.
첫 책을 낸 얼마 후, 누군가 내게 그랬다. 앞으로 밝은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그 말은 격려였지만 곧 상처였다. 열심히 빛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너는 본디 어둠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어쩌면 내가 써왔던 가정사와 아빠 이야기들은 보고 싶고 외로워서 쓴 글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내가 가엽고 안쓰럽지만 그 시절을 지나온 내가 보고 싶고 그립고, 내 곁을 지켜줬던 이들이 또 보고 싶고 그리운 것이다.
상처가 우리들 삶에 남아있는 이유는 그 상처를 삶 속에서 보고 또 보고 그리워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떠나보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우리가 붙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는 이유는 그렇게 보고파하며 그리워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노래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환하게 밝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줄기 빛을 품은 어둠이다. 언젠가 드러날 빛을 소망하며 그리고 쓰고 노래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빛 한줄기를 쓸 거고, 다른 이들의 어둠을 모른척하고 싶지 않다.
"이제 어두운 이야기를 해보세요. 어두운 글을 쓰세요. 어둠을 그리세요. 그래야 한줄기 빛이 보이니까요. 밤이 지나야 아침이 오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