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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Jan 28. 2024

국제도시의 미라클 모닝

스누트 11-12월 · 3회 │ 언젠가 꼭 살고 싶은 집

  <영어회화 100일의 기적> 책을 산 지 6일, <DAY 006 : Look on the bright side>의  다이얼로그 일곱 줄을 중얼대며 커피를 내렸다. 인천 토박이 팀원이 알려 준 동네 카페 원두 향이 꽤 마음에 든다. 삼성동 본사에서 인천 송도점으로 발령난 덕에 출근이 한 시간 늦춰졌다. 수도권 사업소로는 예외적으로 사택 임차 지원금도 나와 한 달 만에 광진구에서 송도로 이사했다. 출근 거리는 똑같이 7킬로미터인데, 7호선과 2호선에 45분 간 슬라임처럼 눌려 다니던 서울과 달리 여기선 자차로 15분이면 회사다. 나도 이제 미라클 모닝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머리 빗고 체중계에 올라갔다 (기분 나빠졌다) 스트레칭 20분. 샤워. 화분 아홉 개에 작은 분수같은 물을 뿌려주고, 책 한 시간, 부동산 유튜브 한두 편. 커피 한 잔이랑 빵 하나 과일 조금 차려 먹기. <영어회화 100일의 기적> 하루 한 챕터 암기. 100일 뒤면 나의 영어 실력도 아침 루틴도 기적을 일궈 낼테니 휴무도 열외 없다. 다만 오늘 샤워는 세수와 양치질로, 메이크업은 선크림으로 간소화하고 요가원으로 출발! 출근이 빠지다니, 이보다 더 완벽한 모닝 루틴일 수가!



  요가원은 회사보다 2킬로미터 가까운데, 차로는 똑같이 15분이다. 송도 안에서는 거리가 얼마든 방향이 어디든 무조건 차로 15분. 하지만 차 없이는 막막하다. 역세권이라지만 지하철까지 걸어서 17분이고, 집 앞에는 버스정류장이 있지만 배차 간격 80분인 광역 두 대, 10분 거리가 40분 걸리는 지선 두 대만 있다. 회식한 날, 소화나 할 겸 걷다 한 시간 내내 아파트 공사장과 공원인 척하는 허허벌판을 지나며 ‘내가 휴먼 스케일을 상실한 신도시에 살고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스무 살 여름방학, 호주 브리즈번에서 안내방송 잘 못 듣고 한 정거장 먼저 내리는 바람에 캄캄한 길을 속절없이 걸었던 밤이 겹쳐졌다. 대구에선 노래 몇 곡이면 금방인 한 정거장이 이렇게 무섭고 가물가물 멀다니. 도시마다 축척이 다르단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모닝 수련을 끝내고 <롯데마트 센트럴파크점>에 갔다. 아사히 슈퍼 드라이가 있나 보는데 누가 톡 쳤다. 


  “Excuse me, Where is the Kimchi?” 


  중년 백인 여성이었다. 국제도시 송도답게 손님 절반이 외국인이라 낯설게 없는 상황이지만 기적의 영어회화 꿈나무는 당황했다. 


  “어…” 


  영어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아직 모닝 루틴이 설익었다 위로하며 셀프 계산대로 가는데 라틴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하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마침 옆을 지나던 큰 이모뻘 마트 직원에게 향했다. 둘은 반상회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나만 국제도시에 아직 적응 못했구나. 오히려 내가 해외 체류자가 되었구나.


  입사 14년 차, 송도는 네 번째 발령지다. 스물넷, 대구 출신 나는 면담 때 서울이면 어디든 좋다 했다. 그렇게 미아에서 3년을 하고 원하는 직무로 전환과 대리 진급을 했다. 대신 대구로 발령났다. 사귄 지 2주 된 남자친구는 2년은 걸린단 말에 “군대 보낸다 생각할게” 하고 서울역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팔찌를 줬다. (오빠, 잘 지내니?) 그리고 3년. 서울 본사 컴백 후 5년.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어디로 발령나든 일주일 안에 새 근무지로 출근하는 유통업 문화엔 아직도 무뎌지지 않는다. 삶의 자전 축이 밖에 툭 떨어진 것 같다. 어떨 땐 내 일상이 남미에서 동남아 셰프가 하는 한식당의 무국적 요리 같다. 이삿짐이 얼추 정리됐다 싶으면 하루 루틴을 만드는 게 발령 루틴이 됐다. 그래야 부유하던 내 두 발이 바닥에 지그시 닿는 듯 안심된다.


  언젠간 내가 한창 걷다 머물고 싶은 곳에 꾹-하고, 엉덩이 무겁게 눌러 앉으리라. 귤 한 박스 나눠 먹을 친구들이 사는 동네. 과실수랑 허브가 잘 자라는 텃밭. 촘촘한 미라클 모닝보다 성글게 짠 오전이 게으르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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