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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Nov 27. 2023

자아 육아 중

스누트 11-12월 · 2회 │ 자식에게 꼭 이렇게 살라고 말하고 싶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친구들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가 연이어 나왔다. MBTI, 미국 하이틴 감성 AI 사진 다음 유행인가? 나도 <정부 24>앱을 깔고 검색했다. 초등학교는 조회 결과 없음. 중·고등학교는 선생님 코멘트가 약하네. 친구들은 ‘창의적이나 주의 산만하다’거나 ‘급우들에게 인기가 많으나 열정이 과하다’는 지능형 악플같은 담임 평가던데. 나는 ‘성실하고 봉사심이 많다’니. 내가? 담임이 서른 명 넘는 애들 쓰다 지쳤거나 내가 생각보다 무색무취애였거나, 둘 중 하나겠다. 그래도 애봉이* 닮은 열네 살 증명사진 내 안광은 뺀질하니, 그냥 선생님 매뉴얼 멘트로 생각해야겠다.


  열살 어린 팀 주니어도 따라 검색하곤 익살맞게 웃는다. 


  “저는 초딩 때도 나오는데요? 책임님은 국민학교라 안 나오는 거 아니에요?” 


  야, 나 입학은 국민학교라도, 졸업은 초등학교거든! 어쨌든 나이스(NEIS)*는 97년생 후배보다 87년생, 나의 보존연한이 3분의 1 지났다고 공증한다. 곧 있음 중·고등학교 기록도 폐기되겠지? 이러다 보면 내가 살았다는 흔적이 남긴 할까? 퇴사하면 그만일 회사, 몇 년간 거래 없음 휴면됐다 소멸될 은행 계좌. 그나마 SNS에 올린 사진이 증거일까? 그마저도 마크 저커버그가 날려 먹으면 끝 아닌가? 삶의 방증이 겨우 데이터 기록뿐이라니, 괜히 서늘하게 씁쓸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걸까? 인류에 프로그래밍된 보존 연한 갱신 욕구로?


  그런데 내 알고리즘은 어디가 꼬였는지, 나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 후세에 길이 전해야 할 소명 같은 재능은 애시당초 물려받지 못했고, 자체 개발도 아직은 그닥이라. 어차피 우주적 관점으로 내 삶을 측량하기엔 나노미터도 광년만큼 무량한 단위일 텐데, 무상한 삶의 무게가 차라리 후련하다.


  전직 장거리 수영선수 나이애드의 허망함도 비슷했을까? 실화 바탕 영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의 그녀는, 노년이란 한계에 압슬 당한 예순 번째 생일 보내고 선언한다. 쿠바 아바나에서 미국 플로리다까지, 스물여덟에 실패한 해상 177킬로미터 수영에 재도전한다고. 감정은 복리 이자 같아서 은퇴 후 30년간 쌓인 무료와 우울이 ‘정신 나간 결심’으로 만기됐나 싶지만, 이제야 ‘진부한 인생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깨달았다며 종단을 준비한다. 이후 5년 간 세 번의 실패. 예순다섯이 된 그녀는 해파리 독과 바닷물에 퉁퉁 부은 다리로 플로리다 해변을 밟는다. 쿠바를 떠난 지 꼬박 이틀 하고 다섯 시간 만이다.


  엔딩 크레딧에 실제 주인공과 그녀의 코치 사진이 나온다. 기미와 주름이 가득한 얼굴. 탄탄한 복근과 매끈한 삼각근. 2시간 동안 본 아네트 베닝과 조디 포스터와 한 치 한 푼 다르지 않다. 예순여섯과 예순둘. 두 배우는 대역도 CG도 없이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연기했다. 아니, 두 배우의 연기 자체가 그 메시지였다.



  영화를 본 다음날 저녁, 서초동 모차르트홀 B-16 석에서 어제의 스크린을 압살하는 현실을 경험했다. 환갑의 이충걸 작가가 쓴 클래식 모놀로그 <브람스라 부르자> 무대로 검정 벨벳 맥시 드레스에 은발 숏 컷의 여든두 살 배우, 박정자가 올랐다. 부모의 죽음, 집에 흐르던 음악, 무대 공포증을 말하는 배우의 깊은 중저음에서 그녀가 삼켜온 무수한 삶이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 대사, 


  “인생은 지루하다가 두려워진다. 사실 두려웠다가 지루해진다” 


  나의 나침반에 툭 갖다 댄 거대한 자석같은 문장이었다. 강력한 자력에 실성한 듯 돌아가는 바늘처럼 두 문장의 순서가 때론 헷갈린다. 나 스스로 나란 인간 하나 잘 키워 내려고 지루한 두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어서인지. 


  두 작품을 보고 나니 불안한 공허가 조금은 데워지는 것 같다. 자신의 삶을 충실히 지어 온 이들이 예순이 되어도, 여든이 되어도 이십대의 자기를 품고 가득 채워 나가는 걸 보여 주었기에. 그리고 소멸되지 않을 기록과 예술을 삶의 증거로 선물해 주었기에.





* 애봉이 : 웹툰 <마음의 소리>에 나오는 캐릭터. 똑단발에 큰 눈이 특징.

* 나이스(NEIS) : 교육행정정보시스템. 교육행정 한정으로 정부통합 문서관리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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