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를 5년째 공부 중입니다.
러시아어를 계속 공부해도 될까?
나는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들, 특히 러시아어를 전공한 사람들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일부는 개전 초기 (특히 3월에서 4월) 러시아어를 배우는 것을 중단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2022년 현재 전공으로 노어노문학과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매일매일이 불안할 것이다.
러시아의 상황은 안 좋은 상황을 다 끌어모은 듯 심각하다. 러시아의 경제적 상황은 두말할 것도 없다.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 엘비라 나비울리나(Эльвира Набиуллина)의 신들린 통화 정책이 아니었다면 러시아 경제는 이미 회생 불능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러시아 문학과 음악의 명색이 무색하게, 문화적 가치는 현대에 들어 증발하는 중이며 신용도는 껍데기만 유지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는 경제적 가치도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신용도도 좋지 못하다. 최근에는 전쟁을 감행하면서 도덕적인 비판도 피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인권 침해, 언론 통제와 민주주의 파괴 국가의 무가치한 언어를 배운다는 꼬리표가 계속 따라붙고 있다. 아마 개전 이후로 주변인들에게 무수히 많은 걱정과 비난을 들었을 터. 나 또한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듬뿍 받고 있고, 잊을만하면 “가서 죽는 거 아니냐"라는 비아냥도 들려온다. 안 그래도 공산권의 맹주였던 사실 때문에 기성세대나 노인층에게 쏘련 빨갱이 말이라는 인식이 공고한 상황에서!
하지만 이럴수록 우리는 더욱 곧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어를 구사하거나 배우는 사람들이 본인을 위안 삼기 위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언어와 정치는 본질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내 우크라이나 친구가 자주 한 말이기도) 언어는 언어 그 자체로의 가치가 있으니, 언어의 가치를 정치적 상황과 결부시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지역이나 CIS 지역에서도 러시아어가 통용되면서 민족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공용어로서의 지위도 갖는 만큼,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별개가 되어야 할까.
언어와 정치를 구분하는 것은 옳을 수 있으나 무모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외국인이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경제적 • 문화적 기회를 사는 것과 같다.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영어가 가장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회는 곧 해당 국가와 관련된 업무를 보면서 경제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언어도 해당 언어가 통용되는 국가의 신용도와 경제 규모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서는 그 나라의 선진적인 정치 풍토와 도덕적인 민주주의가 필수적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전 세계 3억 8000만 명이지만, 전 세계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용자 수는 15억 명이 넘고, 국제시장에서 영어의 경제적 가치는 6171조 4241억 원으로 평가된다. 과연 이 경제적 성과가 정치적인 제반조건의 영향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난 없다고 감히 예측한다.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경제와 언어의 연관성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와 언어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또한, (대부분의 경우에는 외국인에게 정치적 기회를 제공하는 국가가 흔치 않지만) 억압 국가에서 보다 자유로운 국가 (미국, 영연방, 유럽, 중앙아시아*)으로 이민 가는 사례를 본다면 외국어를 배우는 동기에는 정치적인 기회에 대한 필요도 분명 존재한다.
여러 인권 탄압, 무자비한 언론 통제 그리고 오래 지속된 독재 정권을 자행하는 국가의 언어를 배우면서 언어와 정치를 구분시키려는 행위는 얼추 맞는 말일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보자면 무모한 주장이라 생각하는 이유다.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방패로 내세워 본인에게 떨어지는 무수히 많은 의문과 비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들일수록 그 문제에 민감해야 하고,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일 먼저 큰 소리로 러시아의 비도덕적 행위를 규탄해야 하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하여 러시아 정부에게 억압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어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아랑곳 않고 곧아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