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ghee Mar 30. 2024

17년 매미가 울던 그날에

얼마 전 동부에 17년 주기 매미가 출몰했다는 소식은
다시금 10년 전 그때로 나의 시간을 돌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내가 사는 중부에도 지난 2011년에 이 매미의 출현이 있었고 나는 17주기 매미가 울던 그때 내 인생 최대의 슬픔을 겪었기에 그렇다.


2011년 여름초입부터
미주리 세인트루이스는 난데없는 매미우는 소리에 시달리고 있었다.
울음소리뿐만이 아니라 곳곳에 산더미를 이룬 허물들,
문을 열면 날아와 부딪히거나 달라붙는 매미들 때문에 정신이 사나워질 지경이었다.
정상을 넘어서는 숫자로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요란히 우는 이 매미들이 궁금해 인터넷 써치를 해보았다.
정적에 잡아먹혀 종족이 유지되기 힘든 브루드 10이라는 종의 매미들이
몇 년 주기로 왕창 나와서 교미를 하고 알을 까고 종족을 번식하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매미가 떼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왕창 나오면 잡아먹혀도 워낙 수가 많아 다 먹히지 않기에...
그 주기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5년, 7년, 13년 17년 등등이라고 한다.
2011년은 13년 주기 매미와 17년 주기 매미가 만나는 해라 그 수가 어마어마한 것이고
수천억 아니 수조가 넘는 매미가 한꺼번에 땅속에서 올라와 암컷을 유인하는 울음을 울어대고 있다고 했다.
13과 17의 최소공배수를 빼보면 1770년에 이런 해가 있었고
일생에 한번 볼까 말까 한 일을 지금 보고 있다 생각하니
갑자기 매미 울음소리가 멋진 교향악 수준으로 들리는 착각을~~~
암튼
그렇게 매미가 낳은 이 알들은 유충이 되어 땅속으로 들어가 13년을 혹은 17년을 기다렸다가
땅 위로 올라와 부화를 하고 암컷을 찾아 울고 교미를 하고 알을 까고 죽는데
땅 위에서의 삶은 불과 한 달에 불과하단다.
전 인생을 종족유지에 다 쏟아붓고 죽어가는 매미의 일생이라........


이민생활을 하면서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새벽을 가르는 전화는 거의 한국에서 오는 것이고
거의가 위급한 내용을 알려오기에 그렇다.


그런 매미울음 요란하던 6월의 어느 날
그 받기 싫은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나의 어머니께서 그 일생을 마치시고 조용히 영면하셨다는 소식이다.




매미는 내 마음을 아는지 열심히 울어준다.
어머니의 일생을 돌아보다 보니
매미의 일생과 유사한 점이 보였다.
당신의 삶이 과연 있으셨나 할 정도로 자식을 위한 철저한 사랑과 희생과 인고의 삶이셨다.
자식들을 위해 알맹이는 다 쓰시고 껍데기만 남기신 어머니의 일생은
감히 흉내 낼 엄두도 못 내겠다.
나도 어미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요즘의 어미들과 우리 엄마세대의 어미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에
엄마의 부재는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 땅에 그 누가 나를 그렇게 조건 없이 사랑해 줄 수 있었을까?
타국살이가 만만치 않아서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마음속으로 엄마를 불렀다.
그러면 알지 못하는 힘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그저 언제든 달려가면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맘 편히 안아주실 엄마가
이 세상에 계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맘에는 평강이 넘치곤 했는데
엄마의 부고는 내 온몸에서 한순간에 모든 에너지를 다 빼어버린 듯했다.
아마 이런 일을 가리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라고들 하는 것 같다.


미국이민 초기에 나는 이상한 상황을 목격했다.
세탁소를 하시던 김집사님 어머님의 부고를 분명 들었는데 집사님이 예배에 오신 것이다.
“아니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어찌 가시지 않았을까?” 의아했지만 직접 여쭈지 못하고 친한 다른 분에게 물어보았다.
“사업장을 닫으면 단골이 떨어질까 못 가신 거라 들었어”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찌 어머님이 돌아셨는데 그깟 단골 때문에 장례식 참석을 안 하다니.. 한국 갈 여비가 없으신 것도 아닐 텐데.. 하는 맘에 가자미 눈으로 바라보았고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내 일이 아닌지라 그렇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어머님을 여의고서야
모든 사람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천륜을 저버린 것처럼 생각했던 내가
내 살보다 더 아프게 여기고 아파한 어머님의 장례식 참여를 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기가 막히게도 당시 불체자의 신분이었다.
이민변호사가 내 서류를 빠뜨리고 영주권 신청을 하는 실수를 했고 그때가  
학생신분이 종료가 된 시점이었기에 이미 체류기간을 넘어버려 불체신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편과 두 아이들은 영주권을 받아 합법체류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홀로 불체자가 되어 이민법정에 출두하여 추방날짜를 기다리던 중에 어머님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물론 어머님 장례식에 참여할 수는 있었지만 미국에 다시 들어올 수 없게 되고 그러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미 직장을 잡은 남편과 중고등학생이 되어버린 두 아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방안이었다.




부모님의 장례식에 안 가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행동이 아닌가 하던 나의 생각이 철퇴를 맞은 것 같았다.
나도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는 대신 내 남편과 아이들을 선택하고 말았다.
아마 김집사님에게도 나 못지않은 이유가 있으셨으리라 짐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그 날이후로 나는 웬만하면 누군가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토를 달지 않으려 노력한다.


당시만 해도 지금 같은 카톡전화나 페이스톡 같은 게 없어서
국제전화를 걸면 요금이 상당히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라도 전화를 해서
“엄마 잘 지내셨어요?” 하고 안부를 물으면
언제나 엄마는 그러셨다.
“ 그래 나는 괜찮다. 너도 잘 지내지?  
김서방 뒷바라지 잘하고 아이들 잘 키워라.  
내 걱정하지 말고 너나 건강하게 잘 지내라.
전화요금 많이 나온다. 어서 끊어라.”


이국땅 멀리서 고생하는 막내딸에 대한 사랑은
전화를 빨리 끊어주는 것이어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나중에서야 짐작하게 되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에 단 한 번도 온전하게 반응하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저려서 17년 주기 매미와 함께 울던 그 여름이었다.
그렇게 2011년 여름  유난히도 우는 매미울음소리에
내 마음의 울음을 함께 실어 보냈다.




낙엽은 가을에나 어울리는 말인 줄 았았다.
아침에 일어나 뒷마당 덱을 보면
이르다 못해 느낌도 생경한 낙엽들이 뒹굴고 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여름 낙엽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쳐 가거나 무심하게 바라보았을 텐데
여름 낙엽들과 함께 뒹구는 30일의 수명을 다한 매미들의 수많은 주검들이 나로 하여금 빗자루를 들어 쓸게 하며
쓸쓸한 상념 가운데로 데려갔다.


노인들의 애잔한 사랑을 그린 강풀의 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그런 부분이 있다.
여든이 가까우신 분이 돌아가신 상가喪家에서 젊은 사람들이 호상 好喪이라고 하는 얘기를 들은 한노인이
세상에 잘 죽는 게 어딨 냐고 심하게 역정을 내는 장면이다.
물론 그 돌아가신 분의 죽음엔 가슴 저미는 사연이 있기도 했지만
그래, 세상에 잘 죽는 것은 없다는 말에 그때도 동의요
지금은 더더욱 공감한다.


여름 낙엽은 이른 죽음
가을낙엽은 제 때의 죽음
겨울 낙엽은 늦은 죽음이라면


인간의 죽음도
이른 죽음
제 때의 죽음
늦은 죽음
그렇게 나눌 수 있을까?


내 엄마는 여든다섯에 가셨다.
그러면 제 때의 죽음일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호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죽음?
그러나 자식에게 부모의 죽음이 어찌 호상이 될 수가 있을까?
그저 나에게 엄마의 죽음은 그 時가 언제든 이른 죽음일 뿐이다.
엄마의 죽음은 나에겐 그저 너무 빨리 떨어진 여름낙엽일 뿐이다.
엄마는 영원히 나의 마음속에 여름낙엽이 되셨다.


樹欲靜而風不止 (수욕정이풍불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子欲養而親不待 (자욕양이친불대) 자식은 보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


이렇게
여름 낙엽이 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겨울이 되도록 계셔 주셨으면
자식 노릇 톡톡히 해드렸을 텐데
하는 맘으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지만
과연 그 겨울이 자식의 살아생전에 오는 날이던가?
그 겨울은 어머니가 백수를, 천수를 누리셔도 찾아오기 힘든 계절이라
자식의 편에선 언제나 부모님의 죽음은 여름낙엽이시고
어머니의 편에서는 가을 낙엽인 것을 언제쯤부터인가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내가 슬픔의 정점에 있던 날
둘째가 위로했던 말이 있다.
'할머니는 이제 엄마를 위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마치셨기 때문에 가신 거야.
엄마는 아직 할 일이 있으니깐 힘내.'
그 할 일이란 자기를 돌보는 일이란다.
자식들이란 언제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임종도 장례도 함께 하지 못하는 불운의 동생을 위해
오라버니가 짧게나마 자주 소식을 주셨지만 내 맘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자리 잡았다.


귀가 찢어지게 울어대던 매미들이 그 일생을 다 마쳐갈 때쯤이 되자
울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 대신 그 주검들이 한동안 나로 빗자루를 들게 했다.
아침에 여름 낙엽과 매미들을 쓸어 내면서
또 한동안 어머니를 추억했던 것 같다.
그렇게 또 몇 계절을 넘기다 보니
어머니에 대한 마음은 겨울나무에 달린 몇 이파리정도가 되었다.


산다는 것은
자꾸 무언가를 잊어가는 것이다.


그 이후 4년이 흘러 시민권자가 된 남편의 배우자로 영주권을 받고
어머니를 만나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경기도 양수리 공원묘지에 안장되신 어머님 묘지 앞에서 어머니를 추억하며 하염없이 흘러내린 눈물은 오라버니가 건네준 휴지 한 장으로는 도저히 닦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움 속으로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엄마..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팠지만
엄마가 나에게 늘 당부하셨던 그 말 지켜내려고 그랬어요.
그게 김서방 뒷바라지 잘하고 두 아이들 잘 키워내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자식들을 위해 온 세월을 다 바쳐서 살아내신 그 삶을 잊지 않을게요.
나도 엄마처럼 그렇게 내 남은 인생을 가족을 위해 살아낼게요.
엄마 미안해요
엄마 고맙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13년 주기 매미와 17년 주기 매미가 함께 나오는 시기는 내 살아생전 다시는 보지 못한다. 사실 수컷매미 한 마리의 최대울음소리가 자동차 엔진소리에 가깝 다한다. 수억만 마리의 매미가 한꺼번에 울어대니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대화도 불가능하고 밤잠도 설치게 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너무도 성가신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함께 울어주어 임종도 장례도 함께 해드리지 못했던
나의 아픔이 큰 위로를 받았다.
외롭고 힘들었던 이민생활에서 겪었던 내 인생에 감당치 못할 아픔의 순간을 함께 해줬던 17년 주기 매미들을 어찌 잊겠는가!


요란하던 매미의 울음 소리에 묻힌 내 통곡을 나는 기억하고
그리고 이민자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드러내놓지 못하는 아픔도 끌어안을 것이다.
내 어머니의 사랑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하며
그 숭고한 사랑과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힘써 이 생을 살아갈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떠도는 유랑 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