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중세시대 화첩속에서
한 여인이 망치를 들고 남자의 관자놀이에 못을 박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만난 적이 있다.
좀 잔인하기도 하고 내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눈길주기를 거두고 넘어갔다.
바로 그 그림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사사기 4장에 펼쳐진다.
배경지식이 없이 그림을 볼 때와 그 연유를 알고 볼때의 차이는 180도 다르다.
이젠 이 그림을 찬찬히 눈여겨보게되고 짜릿한 흥분까지 느낀다^^
사사 에홋이 죽자 다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맡겼으며
야빈의 압제에 다시 울부짖는 이스라엘백성을 위해 여선지자 드보라를 사사로 세워주셨다.
드보라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 야빈의 군대를 치라하자
바락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드보라와 같이 가면 가겠다고 하고
드보라의 약속을 받아 낸 후 드디어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이끄는 9백의 철병거와 싸우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앞서 가셔서 이미 다 물리치신 후다.
그 싸움에서 간신히 병거에서 도망친 시스라가 숨어든 곳이 겐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이었다.
그 야엘의 장막에서 일어난 일이 사사기 4장의 중심사건이다.
왜 시스라가 헤벨의 집으로 도망쳤는지는
하솔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삿4:17) 에서 밝혀진다.
모세의 장인 집안으로 이미 이스라엘에 편입된 겐사람들이니 하나님을 아는 자들일텐데
헤벨은 가나안에 들어가 살면서 이편도 저편도 아닌 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야엘의 이후 행동에서 보아알듯이 그런 집에서 오히려 이방여인 야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가고 있었고
하나님편에서 생사를 건 결단을 하고 행동에 옮긴 그 장막은
남편 헤벨의 장막에서가 아니라 아내 야엘의 장막이어야했다.
지금 밖에서 일어난 전쟁의 양상을 다 알고 있었을텐데 적장 시스라가 찾아들었으니
야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스라엘편을 들다가 나중에 전쟁에서 지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고
시스라를 구한다면 하나님을 저버리게 되는 것인 이 절대절명의 상황앞에서
야엘은 하나님편을 들기로 결단을 한 것이다.
장막을 받치고 있던 말뚝을 빼서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관통시켜 죽이는 여인 야엘이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로서는 그 어떤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을 알면서
그 순간의 긴박함에 나를 대입시켜넣어보면서 그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사기 4장에 나오는
어정쩡한 믿음으로 영광을 얻지 못한 바락이나, 부계사회에서 아내보다 못한 자리로 전락한 헤벨과는 달리
확신에 찬 믿음으로 당당하게 하나님의 편에 선 두 여인 드보라와 야엘을 보면서
어느 줄에 서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답을 가진다.
인생은 매순간이 선택으로 가득차 있다.
잠을 더 잘까? 일어날까?
드라마를 볼까? 책을 읽을까? 같은 자질구레한 일에서부터 인생의 향방을 바꾸는 큰 일까지..
결국 크게는 두 가지, 세상쪽이냐 하나님쪽이냐 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펼쳐진 상황앞에서 하나님편을 택하고 행동으로 실행한 야엘의 모습은
그녀의 평소의 삶의 신조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인 야엘의 잔인함을 논할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단호한 믿음을 배워야 한다.
뜨뜨미지근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토해버리겠다고 까지 하셨다.
하나님편을 든다는 것은 아무 희생의 댓가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곳은 처절한 싸움이 있는 곳이다.
상대를 찔러서 무찔러야 하는 것이다.
야엘의 장막안에서 일어난 그 싸움은 가끔 일어나는 희귀한 싸움이 아니다.
내 삶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매순간의 싸움인 것이다.
어느 편에 서느냐를 결정하는 ..
하나님편에 서서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끈 이방여인 야엘의 장막이
나의 장막이 되길 소원한다.
하나님
야엘의 믿음의 결단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 결단의 순간 야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생각하며
제 삶의 자리도 그렇게 온전한 결단으로
하나님께 승리를 안겨드리는 야엘의 장막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