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를 하고 내리자마자 보이는 둔덕에서 작은 움직임이 보이길래 가만히 들여다 보았더니 새끼 살모사가 사람 소리에 놀라 몸둘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처음엔 우리도 놀랐지만 도망갈 구멍 찾는 녀석이 애처로워 조금 더 지켜 보다가 지나쳐 왔다.
우리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바쁘니까.
부모님과 제주 여행은 내가 아주 어렸던 때, 기억도 나지 않던 나이에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여행이 처음으로 여겨진다. 하루는 한라산으로 결정되어 있고 남은 하루는 어디를 갈까 하다가 엄마가 가보고 싶다고 한 거문오름으로 정했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생수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가 없는 곳이라고 한다. 거문오름의 총 거리 10km를 걷는데 물만 가져갈 수 있다는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잠시, 우리나라 국민의 의식 수준이 많이 높아진 것 같아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산수국이다.
제주에서는 도로 갓길이나 집집마다에서 수국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오름 안에서도 산수국이 피어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산수국은 일반 수국과는 좀 다르다. 내가 꽃잎인 줄 알았던 네 개의 큰 잎은 꽃이 아니라 꽃받침이라고 한다. 거문오름 해설사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 꽂받침은 꽃들이 벌이나 나비같은 곤충을 불러들이는 일을 한다고 한다. 수정이 다 끝나면 꽃받침은 뒤집어 진다고. 뒤집어진 꽃받침을 보면 곤충들도 오여들지 않는다고 한다. 꽃과 곤충들의 언어가 참 재밌었다. 학교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이야기,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도 초등학생이 된 느낌이었다.
제주에는 분화구가 많다고 한다. 언뜻 보기엔 평평한 언덕 같은데 오래전 용암이 분출했던 곳에 풀이 나고 나무가 자리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볼수록 신기한 일이다.
거문오름을 지나다보면 자연이 만들어놓은 구멍들이 많다. 지금은 그 입구를 나무와 풀들이 가리고 있어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구멍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용암이 만들어 놓은 굴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의 은신처로 쓰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굴도 곳곳에 있다고 한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살피다가 발견한 달팽이다. 모습이 예뻐서 찍어 보았다. 과학동아나 곤충백과사전에나 나올 법한 모양의 달팽이가 눈 앞에 있어 신기했다. 거문오름을 폐쇄하고 잠시 인간의 발길을 끊었던 이유가 여기 있는 듯하다.
중국산 목이버섯은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실제 나무에서 자라는 버섯은 처음 보았다. 보송보송할 것 같아 만져 보았는데 물컹한 느낌에 잠깐 놀랐다.
빠른 걸음으로 거문오름 3코스를 지나가다가 눈에 들어온 녀석이다. 껍데기가 예뻐서 눈에 띄었다.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꼼짝도 안하는 모양새가 사람 소리를 듣고 놀라 멈칫하고 있는 것같아 보였다. 이리저리 예쁘게 찍어보려고 카메라를 여러 번 들이댔지만 그럴수록 움츠러드는 녀석 때문에 측면에서 찍고 돌아서야 했다. 더 괴롭히면 내가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말이다. 거문오름은 사람의 발길을 극도로 제한하면서까지 보존해 낸 자연의 힘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돌 하나에 네 가지 식물이 함께 살아내고 있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이끼를 시작으로 넝쿨까지 서로의 영역을 적당히 인정해 주면서 공존하는 생명들이 예뻤다.
동네 야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엉겅퀴지만 사방이 초록인 오름 안에서 자줏빛을 뿜어내는 자태가 멋져 보였다.
편백나무 잎도 이렇게 자세하게 들여다 보기는 처음이었다. 잎의 앞면과 뒷면의 색이 달라 편백이라 부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 뒤집어 보니 잎의 색이 달랐다. 피톤치드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나무라 요즘은 건강한 집 짓기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다. 가까이 다가서면 특유의 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가만히 있어도 건강해 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거문오름 3코스가 시작되는 길이다.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어도 무성한 나뭇잎들이 지켜주고 있어서 직사광선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길이다.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은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아니라 올 봄 떨어진 낙엽들이라고 환다. 사철 푸르른 나무는 오히려 겨울을 지나 봄에 낙엽을 떨어뜨린다고 한다. 일부러 연출한 것만 같은 분위기에 빠져, 저 길을 지나면 다른 세상의 문이 나올 것 같았다. 동화같은 곳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이 많았다. 독초도 많이 있으니 마구 만지지는 말라 주의를 해설사로부터 듣고 나서는 가능하면 눈으로 보고 사진을 찍어 남겼다. 열매인지 꽃인지, 잎인지 구분이 어려운 식물들도 많았다. 일일이 찾아보기는 버거워서 눈으로 보고 지나쳤다.
제주 한달살이를 계획하고 여행을 온 부모님께 잠시 들렀다가 함께 거문오름에 오게 되었다. 엄마와 나는 신이나서 걸었고 걸으면서 이것저것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아빠는 생각보다 더 지루해했다. 한 번 보았으면 되었다고 두 번 올 곳은 아니라며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퉁명스럽게 말했다. 투정같은 아빠의 말을 들으며 두 사람의 취향이 정말 많이 다르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되었다.
40년이 넘게 함께 살아온 부부인데 여전하다. 하지만 어딜 가든지 꼭 둘이 함께 다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음식에 대한 취향도 다르고 여행에 대한 생각도 다르다.
보름만에 만나 나 역시도 부모님과 제주에서 추억을 만들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여행에 대한 의견차이로 이미 거문오름 탐방 시작 전부터 다툼이 있었다. 특별한 계획없이 여행지를 다니다가 이리저리 떠밀리듯 다녀보는 것도 여행이라는 엄마와 일어나는 시간부터 잠드는 시간까지 사전에 계획하고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 좋은 여행이라고 하는 아빠는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출발 시간에 맞추어 해설사가 있는 곳으로 가야했다. 뒤따라 천천히 걷는 나는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고 잠시 후회도 했었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의견충돌은 있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탐방에 집중했고 50여 명이 되는 탐방객들 사이에서 떨어지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탐방을 마쳤다.
거문오름 마지막 코스에서 볼 수 있었던 수직동굴 사진이다. 하얗게 올리오는 수증기는 동굴 안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공기 중의 기온보다 동굴 안의 기온이 낮아서 생기는 수증기인데 마치 선녀가 숨어 있으면서 위장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이야기가 바로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에게 읽히는 동화들도 모두 허구에서 가져온 것은 아닐 수 있겠다. 옛 조상들이 본 것을 가지고 상상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 법하다.
거문오름 3코스를 다 지나 탐방을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거문오름은 제주 오름 중 유일하게 일방통행만 가능한 코스다. 왔던 길을 돌아갈 수가 없다. 숲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인 듯했다. 무색 무취의 물만 들고 들어갈 수 있는 거문오름을 전부 탐방하고 나오면서 속도를 조금 더 늦추고 자세히 보고 올 것을, 시간에 맞추겠다고 다소 빠르게 걸었던 것이 아쉬웠다. 육지에서 보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씩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나무와 풀, 꽃들을 한 번 더 보고 찍어올 것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던 순간순간이 아까웠다. 이 부근에 와서 부모님은 또 한 번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점심 식사 메뉴 때문이었다.
검색창에 식당 이름을 입력해서 찾아 보다가 노출되지 않은 정보 때문에 갑논을박 하다가 결론은 일단 가 보는 것으로 끝냈다.
대체 왜?!
이 좋은 시간에 대한 여운을 만끽하지도 못하고 현실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인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에 한 번 더 가 보기로 마음에 다짐하고 탐방소를 나왔다. 다음엔 꼭 혼자 오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