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의 글로벌 히치하이킹, 꿈을 좇아 10

10부. 미국과 영국 사이, 그 겨울의 거리

by Coo Lee

인디애나 주의 작은 타운, 워서(Warsaw).

그곳에서 버티듯 살아온 지 다섯 달쯤 되었을 때였다.

예정돼 있던 소식이었지만,

통보를 받는 순간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영국 발령.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를 총괄하는 본부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설렘이 먼저였을 텐데,

이번엔 책임의 무게가 앞서 다가왔다.


가장 큰 걱정은 아내였다.

둘째를 임신한 몸은 이미 지쳐 있었고,

미국 생활만으로도 이미 체력과 마음이 바닥나 있었다.


“여기서 다시 유럽으로 간다고…?”


새로운 병원, 새로운 집,

아들의 학교, 교통, 언어…

아내의 표정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몸도, 마음도… 너무 무리야.”


며칠 동안 고민과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러나 돌고 돌아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미국에 남고,

그는 혼자 영국으로 가는 것.


12월.

겨울이 막 시작되던 어느 흐린 날,

그들은 워서를 떠나 동부로 이사했다.

아내가 그나마 익숙한 곳—

예전에 살던 학교 근처의 작은 아파트였다.


이사짐을 정리한 뒤,

그는 영국에서 사용할 최소한의 짐을 챙겨

혼자 공항으로 향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초라해 보였다.

삶이라는 게 가끔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비행기 안.

옆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이

그 어떤 풍경보다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거기 있어야 할 사람들—

아내와 아들.


그 빈자리가 대서양보다 더 넓게 느껴졌다.


영국에서의 생활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

미국에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자기야… 차가… 길에서 갑자기 시동이 꺼졌어…”


아내의 목소리는 뚝뚝 끊겼다.

밖은 눈보라.

도로는 얼어붙어 있었고,

뒷좌석의 아들은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내는 배를 감싸 쥔 채,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서툰 영어 탓에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 사무실 한쪽에서

그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손을 쓸 수 없는 거리.

달려갈 수 없는 바다 너머 대륙.

그는 단숨에 고립된 기분 속으로 떨어졌다.

대서양 한가운데에 혼자 떠 있는 것처럼.


‘왜 하필… 내가 없을 때 이런 일이…’


가슴속에서 죄책감과 분노가 뒤섞여 치밀어 올랐다.

어쩌지도 못한 채 캔틴을 서성이다가,

번개처럼 한 단어가 떠올랐다.


AAA.


그는 서둘러 아내에게 다시 전화했다.

위치를 확인하고 즉시 견인 요청을 넣었다.


그리고 아내가 더 불안해하지 않도록

전화기를 단단히 붙들고 말했다.

“괜찮아. 이제 금방 사람이 갈 거야.

조금만… 정말 조금만 버텨.”


아내와 아들은

차갑게 식어 쇳덩어리가 된 차 안에서

두 시간을 서로 부둥켜 안고 떨며 기다렸다.


겨우 견인차가 도착했고,

근처 정비소로 옮겨졌는데—

그곳이 마침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따뜻한 물.

난로의 열기.

집까지 직접 데려다 주는 배려.


그제야 아내는 긴장이 풀렸는지

작게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그 울음은

대륙을 건너 그의 가슴을 천천히 무너뜨렸다.



그 뒤로도 아내는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유치원생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채

한 달에 한두 번씩

왕복 두 시간을 달려 병원에 다녀와야 했다.


만삭의 초보 운전.

어린 아들.

배 속의 또 다른 생명.


그는 영국에서

아내의 하루하루가 어떤 무게였는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연락이 쉽지 않은 날이 많았다.

그래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그는 대서양을 사이에 둔 채

속으로만 곱씹고 태워야 했다.

그 바다는,

그를 가장으로도 남편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한편 그는 영국에서도

또 다른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운전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운전석은 반대,

차선도 반대,

회전 방향까지 모두 반대.


유난히 많은 라운드어바웃은

돌 때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회사까지는 30분 거리였지만

길눈이 밝은 그조차

익숙해지는 데 한 달은 걸렸다.

적응하기도 전에

차가 반파되어 폐차될 만큼 큰 사고를 겪으며

그는 그 땅의 낯섦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리고 날씨.

한겨울에 비가 오다가,

눈이 되다가,

다시 해가 드는…

그야말로 변덕의 왕국.


그러나 무엇보다 힘든 건

영어였다.


겨우 미국식 억양에 익숙해질 만하자

영국 영어는 또 달랐다.

특히 스코틀랜드 등 북부 출신 동료들의 말은

단어 몇 개만 가까스로 건질 정도였다.


회의를 들어도 절반은 놓치고,

보고를 해도 자신이 없었다.


새로운 대륙.

새로운 직장.

새로운 언어.

그리고 아내와 아이가 없는 겨울.


그해 영국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고,

혼자 버텨야 했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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