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기대보다 무게, 돌아갈 수 없는 길
워서에서 그는 서서히 깨달아갔다.
새로운 삶은 언제나 기대보다 먼저
그 무게가 찾아온다는 것을.
아내는 일주일이 넘도록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국으로 오던 내내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얼굴에서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도시마다 밤하늘을 가득 채우던
독립기념일의 불꽃놀이조차
그녀의 눈에는 스치듯 지나갔다.
며칠 동안 집을 비우고,
열여섯 시간을 도로와 싸우듯 달려
워서의 집에 도착했을 때도
그를 맞이한 아내의 표정은
반가움보다 지친 기색이 먼저 보였다.
그는 여독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옅어져 갔다.
며칠 뒤 늦은 밤이었다.
“피가… 멈추질 않아.”
떨리는 아내의 목소리에
그는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가슴을 움켜쥔 채,
낯선 나라의 밤길을 응급실을 향해 달렸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들이
묘하게 흔들려 보였다.
의사들은 곧바로 검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예상 밖의 말을 건넸다.
“임신 중 출혈입니다.
원인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의사의 말에
기쁨과 불안이 동시에 몰려와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결국 그의 마음엔 또 하나의 짐이 얹혔다.
6년 전 첫째가 태어났던 그날의 기억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첫째 때도 위기는 전조 없이 덮쳐왔다.
새벽, 양수가 터졌지만 초보 부부였던 그들은
병원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그 짧은 지체가
아기의 생명을 위험의 가장자리까지 몰아갔다.
긴급 제왕절개.
수술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손끝까지 얼어붙는 공포를 느꼈다.
태어나자마자 앰뷸런스로 급히 이송되는 동안,
그 과정은 마치 007작전을 연상시킬 만큼 숨가빴다.
아기를 깨워 놓기 위해 간호사는 수시로 작은 발을 꼬집었고,
앰뷸런스는 인도와 차도를 가리지 않은 채 쉼 없이 질주했다.
그 짧지만 끝없이 느껴지는 시간 동안
누구도 단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국내 최고 시설의 대학병원 신생아중환자실.
그곳에서 마주한 아기의 모습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주먹만 한 작은 몸에
틈이 없을 정도로 바늘과 선이 꽂혀 있었고,
기계음은 생명과 죽음 사이의 간격을
잔인하게 세고 있었다.
면회는 하루 한 번. 단 몇 분.
그 몇 분을 위해
아내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병원을 찾아왔다.
하지만
짧은 면회 후 복도를 걸어 나오는 그녀의 표정엔
희망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견디기 위해
울음을 꾹 눌러 삼킬 뿐이었다.
회복은 기적처럼 찾아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한 달 뒤,
아기는 갑자기 호흡을 멈췄다.
의료진이 달려들어 강제 호흡기로 숨을 이어 붙였고,
아기는 다시 중환자실로 실려갔다.
그곳에서 열흘 동안
또 한 번 생과 사의 문턱을 버텨야 했다.
그 두 번의 절벽 끝에서 가까스로 돌아온 아이,
그리고 그 절벽 앞에서 날마다 자신을 태워가던 아내.
그 기억들은
아내의 “피가 멈추질 않아…”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그의 가슴 깊은 곳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마치 묻어두었던 공포가
한꺼번에 되살아나며
숨을 틀어막는 듯했다.
다행히 병원을 다녀온 뒤로는
한동안 겉으로 드러나는 이상 징후는 없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내는 음식을 입에 대는 것부터 힘겨워했고,
간신히 삼킨 것조차
얼마 버티지 못한 채 모두 토해냈다.
한국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지만
아시아 식재료 하나 구하기조차 쉽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그는 주말마다 두세 시간을 달려
시카고와 인디애나폴리스의 한국 마트를 전전했다.
그러나 정작 아내가 삼킬 수 있는 건
기름기 거의 없는 두부 부침 몇 조각뿐이었다.
그 몇 조각이 그녀 하루를 지탱해주는 전부였다.
그러나 그의 일상은 잠시도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출근과 함께 또 다른 전장이 그를 맞이했다.
컴퓨터와 책만 알던 그가
난생 처음 뛰어든 메디컬 디바이스 산업은
그동안 알고 있던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해부학 공부는 기본이었고
수습 과정의 필수 단계로
수술을 참관해야 했다.
철저한 소독 과정과 가운 착용을 마친 뒤,
마스크와 캡을 갖춰 쓴 그는
낯선 수술실 한쪽에서
숨을 고르듯 조용히 서 있었다.
절개, 지혈, 기계음, 공기 속의 열기—
그가 알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수술대 위에서 빠르게 오가는 의료진의 손길,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움직이는 기구들.
그 이름도, 용도도 아직은 그의 언어 바깥에 있었다.
몇 번의 참관 끝에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기 소작기로 지혈하면… 혈관이 다 막히는 건가요?”
의사는 담담히 대답했다.
“아니요, 몸은 스스로 다시 길을 냅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익숙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 세계—
그곳이 바로
그의 새로운 전장이었다.
학교에서 겨우 되찾았다고 믿었던 자신감은
미국의 첫 일상 앞에서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라도
그가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고,
그들을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두려움이 그의 어깨를 짓눌러도
멈출 수는 없었다.
워서에서의 첫 출근은
화려한 시작이 아니었다.
그를 기다리던 건
낯선 공기처럼 차갑고 묵직한 책임뿐이었다.
그는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 첫 발을 내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