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부. 추방과 재입국, 국경을 넘어
영국 리즈에서 새 생활에 적응하느라
하루하루가 버겁던 12월,
예고 없이 한국 지사에서 연락이 왔다.
“여대생 인턴 한 명이 영국으로 파견됩니다.
체류 기간 동안 잘 부탁합니다.”
쓰디쓴 영국의 겨울 한복판에서
그 말은 결코 가벼운 부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밤,
그는 작은 지방 공항으로 향했다.
도착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한산한 대합실 어디에도 그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비행기가 착륙하고 공항이 텅 비었을 즈음,
중년의 공항 직원이 다가왔다.
“혹시… 한국에서 온 여학생을 기다리십니까?”
직원을 따라가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이유는 단순했고,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노동허가서 없는 ‘인턴’ 입국.
“불법 근로 목적 입국으로 간주됩니다.
즉시 추방 조치입니다.”
그의 머리가 하얘졌다.
조그만 실수 하나라도 생기면,
이 아이의 인생을 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오늘 밤 비행편은 없습니다.
당신이 데려가 하룻밤 재운 뒤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출국시키세요.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당신의 노동허가서도
즉시 취소됩니다.”
협박 같았고,
현실이었다.
그는 여학생을 데리고 공항을 나섰다.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이
그래도 한국인을 만났다는 사실에
잠시 안도하는 듯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그는 회사로 돌아가 한국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숨도 고르지 못한 채 상황을 쏟아냈다.
잠시 뒤, 답이 돌아왔다.
“일단 프랑스로 보내세요.
노동허가서가 나오면
그때 다시 영국으로 재입국시키죠.”
그렇게
즉석에서 ‘프랑스 대기 전략’이 만들어졌다.
다음 날 새벽,
그는 여학생을 프랑스로 보냈다.
하지만 연말이었다.
관공서의 시간은 멈춘 듯했다.
하루, 이틀, 사흘.
노동허가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리 저리 전화를 넣은 끝에
연말 연휴 직전,
노동허가서가 간신히 발급됐다.
그제야 숨을 돌리려는 순간,
한국에서 또다시 연락이 왔다.
“여학생 어머니가 프랑스로 출발 예정입니다.”
문제는 더 커졌다.
그는 파리에서 한참 떨어진
프랑스 남부 보르도에 있는
그 아이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다음 날,
어머니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샤를 드골 공항에서 만나자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노동허가서를 챙겨
곧바로 차에 올랐다.
밤새 열 시간을 달려
도버 해협을 건넜고,
파리의 작은 호텔에서
잠깐 눈만 붙인 뒤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피켓을 발견한 여학생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애써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걱정 근심이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넘기지 못한 채
그들은 여학생을 기다렸다.
오전이 지나고
오후가 다 가도록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여학생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애만 태우다
하는 수 없이 호텔로 돌아가던
저녁 여덟 시 무렵,
불현듯 전화가 울렸다.
“죄송해요… 떼제베를 놓쳤어요.
지금 파리에 도착했어요…”
그 순간,
조금 전까지 무너져 있던 어머니의 얼굴에
비로소 온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그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다음 날,
그들은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그는 서류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추방당한 외국인의 재입국은 훨씬 더 까다롭기에
절대 실수가 있으면 안 되었다.
“재입국… 가능할까요?”
직원은 잠시 서류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네.
입국 심사를 잘 통과하시면 됩니다.”
‘잘’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점심을 서둘러 마치고
그는 다시 도버 해협으로 향했다.
차에 탄 채
영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려는데
서류를 확인한 심사원이 차를 가리켰다.
“차를 빼서 저 쪽에 주차하고 기다리세요.”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또 조사였다.
여학생은 다시 불려갔다.
그는 밖에서 두 손을 맞잡고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10분…
한 시간…
어둠과 바닷바람이 내려앉을 즈음,
문이 열리고
한 직원이 여학생을 데리고 다가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마치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듯
머리칼과 온 신경이 곤두섰다.
“음…
재입국 허가되었습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 하지 마십시오.”
차에 앉은 채로
온 몸의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혹시 다시 부를까봐
고맙다는 인사말도 제대로 못 챙긴 채
얼른 차를 몰아 기차에 올렸다.
그리고 도버 해협을 건넌 뒤,
드디어 영국 땅으로 넘어온 것이 실감이 났다.
다시 다섯 시간을 달려
자정 무렵 집에 도착했다.
온몸이 피로에 잠긴 채
그는 문득 생각했다.
“어제와 오늘은…
정말 길다.”
그러나 안도와 감사,
그리고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묘한 평온함으로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그 이후로,
그는 가끔 그 겨울의 소녀를 떠올린다.
그날,
힘겹게 국경을 넘었던
그 가녀린 소녀는
지금,
어려운 사람들의 곁에서
변호사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