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세기 갈릴리 농민들은 십일조와 봉헌물 바쳐야 했고, 세금도 잔뜩 내야 했다. 추수 때가 되면 성전관리들이 나타나서 십일조와 봉헌물을 뜯어갔다. 당시의 소작농들은 수확의 10%를 십일조로 바치고, 50%는 지주한테 내고, 갖가지 세금을 헤롯 안티파스와 로마에 내야 했다.
십일조는 농산물로 내지만 세금은 현금으로 내야 하니 농민들은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빚을 갚을 형편이 못 되니 농지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심지어 딸을 팔아 연명하는 농민들도 있었다. 게다가 포도재배가 유행하면서 부자들이 농지를 포도원으로 바꾸는 바람에 식량 사정은 더 나빠졌다. 먹고살기 힘든 농민들은 굶주림과 소외감에 시달리다 못해 중풍이나 정신착란 같은 병까지 앓게 됐다.
기도와 영성 생활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던 예수는 집을 떠나 가난한 사람들 곁으로 갔다. 그들을 위로하고 병을 고쳐주며 “우리 함께 '하느님 나라' 만들자!”고 외쳤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세례자 요한이 말한 사후의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세우려던 거였다.
예수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지배체제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라고 외쳤다. 당시의 지배체제는 정치와 종교가 손잡고 운영되는 시스템이었다. 로마제국은 무력으로 지배하고, 왕과 총독은 칼로 위협하고, 성전은 율법으로 백성들을 착취했다.
성전 말단 관리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부유함은 주님의 축복이고, 가난은 주님의 징벌"이라고 세뇌했다. 하지만 예수는 "가난은 지배체제의 억압과 착취 때문"이라며, 하느님은 우리가 요청하기도 전에 죄를 용서해주는 분이라고 가르쳤다. 그 지긋지긋한 죄의식을 날려버린 거다.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이 망한 게 계명과 율법을 안 지켰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예수는 "누가 통치하든 지배체제는 억압과 착취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돕고, 이자 받지 말고, 탕감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였다.
예수의 메시지는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예수의 하느님은 월등한 폭력을 휘두르는 신이 아니라, 어떤 보복도 하지 않고 폭력도 허락하지 않는 분이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폭력을 단념해야 한다,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하되 폭력은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비폭력 투쟁이었다.
하느님은 풍족한 세상을 만드셨는데 지배 체제가 다 착취해버린 탓에 모자라게 된 거다. 성전체제는 백성들 착취하고, 십일조 안 바치면 죄인으로 몰아 추방해버렸다. 예수는 그런 죄인들을 오히려 '하느님 나라'로 초대했다.
회개는 지배 체제에 협력하지 않고 결별하는 거고, 구원은 그 체제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다. 믿음이란 폭력 휘두르는 신이 아니라 무한히 베풀고 용서해주는 하느님을 믿는 것,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한다는 거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크게 성공해서 수백 명의 제자들과 수천 명의 신자들이 따라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성전당국은 예수를 체포해 심문했고, 신성모독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유대총독에게 보내 십자가형을 요구했다. 결국 예수는 로마제국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바로 2천 년 전에 예수가 한 일이다.
예수가 처형당한 뒤, ‘하느님 나라’도 그와 함께 하늘로 사라져버렸다. 남은 건 예수의 추종자들이 만든 기독교였고, 그중에서도 바울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예수보다도 더 높게 추켜세웠고, 바울은 예수의 생애를 무시하며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바울의 주요 사상이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됐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는 하느님 자체로서 동정녀를 통해 이 땅에 왔고, 기적을 많이 행하다 부활한 존재라고 설정했다. 예수가 하느님 자체라는 것,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 등등은 ‘하느님 나라’의 예수와는 너무 멀게 느껴진다.
바울은 동정녀 탄생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몰라서 그랬을까? 복음서도 마태와 누가만 동정녀 탄생을 말한다. 그들은 바울조차 모르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참고로 마가나 요한은 예수의 출생에 대하여 아무런 말이 없다.
아무튼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예수의 존재를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동정녀는 성행위 경험이 없는 여자를 뜻하는데,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단다. 왜 굳이 동정녀 탄생이어야 했을까? 성행위를 거룩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지저분하고 더럽게 여겨지는 것이 성행위다. 그러니 거룩한 예수는 동정녀 탄생이어야 한다. 대충 그런 논리였을 거다.
그러나 어차피 세상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이고, 사람의 몸도 그렇다. 그런데 거룩한 예수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왔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했다. 진주가 돼지우리에 던져져도 진주인 것처럼, 거룩함은 무너지지 않는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든, 강간으로 태어났든, 예수의 거룩함엔 지장이 없다. 500년 전에 태어난 소크라테스도 동정녀 출생설이 있고, 로마의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도 동정녀 출생 전설이 있다. 그래서 어떤 교부 철학자는 “왜 이교도들이나 하는 걸 따라 하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이라는 것도 공허하게 들린다. 도대체 예수의 뭘 믿으라는 건가? 기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설교를 믿으라고 한다. 성경의 모순을 합리화하고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자들이 자기의 설교를 믿으란다. 농민 반도들을 개 잡듯 때려 죽이라는 기독교지도자의 설교를 난 믿을 수 없다.
그럼 죽은 뒤 천국과 지옥 문제는? 그건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걸 만든 존재가 알아서 정할 문제다. 심판자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결정할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바울이나 복음서 저자들도 모르면서 아는 척했다. 아주 고약한 놈들이다!
나는 불타는 지옥으로 위협하는 예수가 아니라,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세운 예수를 믿는다. 바울이 ‘주님’이라고 부르던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을 '형제자매'로 여겼던 예수를 믿는다. 그리고 비폭력 투쟁으로 지배체제에 맞서 싸운 예수를 믿는다.
내게 예수는 주님이 아니라, 다정하고 친근한 형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그런 예수를 만나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