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주인을 기독교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느님으로 해석했다. 조금 다른 시각이 있어 그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련다. 참고로, 이 내용은 필자의 졸저이자 역작인 <인류의 인플루언서, 예수>에서 다룬 이야기임을 밝혀 둔다.
우선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부터 보자.
<어떤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재산을 맡겼다. 한 종에겐 금 다섯 달란트, 또 한 종에겐 두 달란트, 마지막 한 종에겐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장사해서 돈을 갑절로 불렸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걸 땅에 묻어 두었다.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시작했다. 돈을 불린 두 종은 칭찬받았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한테 “당신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라 두려웠다”라며 땅에 묻어둔 걸 돌려줬다.
그러자 주인이 버럭 화를 내며 “악하고 게으른 놈아,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고? 그러면 내 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지! 한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줘라."라고 했단다.
그리고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넘치게 되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아라.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다."라고 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주인을 하느님으로, 달란트를 재능으로 해석했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잘 알고, 거기에 맞게 달란트를 맡겼으니, 종들은 감사하게 받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거다. 두 종은 잘했으니 칭찬받고, 한 종은 게을러서 쫓겨났다는 게 전통적인 해석이다.
근데, 이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나? 동어반복이라고! 그냥 이야기를 한 번 더 한 것에 불과하다. 유치원 아이들도 이런 정도는 알 수 있다. 예수가 이따위 교훈을 주려고, 굳이 이야기 만들고 시간 내서 설교까지 했다?
다른 시각으로 보자. 이건 주인한테 항거하는 종의 이야기다. 옛날 갈릴리에서 높은 이자 때문에 농부들이 망한 건 다들 아는 얘기다. 고리대금업자 주인은 충성스러운 종들로 돈을 굴리며 부자가 되고, 농부들은 가난의 늪에 빠진다. 그래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이 고리대금에 쓰이지 못하도록 땅에 묻어둔 거다.
고리대금이라니, 뭔 생뚱맞은 말이냐고? 주인이 “너는 내 돈을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받게 해야 했다”라고 한 걸 보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고리대금으로 굴려서 돈을 불린 거다. 주인이 얼마나 오래 떠나 있었기에, 그동안 돈이 갑절로 불어났겠는가? 1년 만에 돌아왔다면, 이자를 100%나 받은 셈이다.
그러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는 건 무슨 뜻인가? 노동 없이 이자로 먹고산다는 거다. 하지만 이건 종으로서 쉽게 할 말은 아니다. 나머지 종들은 배를 남겼는데, 한 푼도 남기지 못한 주제에 어딜 감히 주인한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는 건 뭘까, 없는 자는 빼앗길 것도 없잖은가? 빚을 못 갚으면, 다시 말해 돈이 없으면 땅까지 빼앗긴다는 거다. 당시 갈릴리에서 빚 때문에 땅을 빼앗기고 소작인이 되는 일은 흔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네 사람은 누군가? 주인은 로마제국이고,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대제사장들,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다. 그럼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가 바로 예수다. 진짜? 진짜다, 그래야 말이 된다.
예수가 이 비유를 통해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저항하자고 외친 거다. 이 이야기의 청중들도 모두 그렇게 들었을 거다. 정말? 당시 갈릴리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해석했을 거다. 하지만 항거한 종은 공동체에서 추방당한다. 그래서 예수는 이들을 품기 위해 ‘하느님 나라’를 세운 거다.
이번에는 누가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 이야기를 살펴보자.
<어느 날, 한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외국으로 떠났다. 수확철이 되어 주인은 종을 보내 세를 받으려 했는데, 농부들이 종을 때려서 빈손으로 보냈다. 또 다른 종을 보내고, 세 번째 종까지 보냈지만, 다들 쫓겨났다.
기가 막힌 주인은 “내 아들이면 존중하겠지” 하면서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이 아들을 보자마자 ‘이건 상속자잖아? 죽여서 유산을 우리 걸로 만들자!’ 하며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 죽여버렸다.
주인이 돌아와서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거 아니겠느냐? 예수의 이 말에 사람들이 “에이! 그렇게 되면 안 되죠”라고 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주인을 하느님, 농부들을 성전당국의 하수인들로 해석해 왔다. 하느님이 예언자들을 보냈는데, 성전당국이 그들을 다 죽였다. 마지막에는 아들마저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거다. 그래서 하느님이 성전당국을 심판할 거다.
근데 이 해석도 듣다 보면 하품이 나와 턱주가리가 아플 지경이다. 이 또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가 가난하고 배고픈 청중들에게 이런 얘기를 비유까지 만들어서 했다고? 그저 십자가와 고난에 끼워 맞추려니 그런 설교를 하게 되는 거다.
여기 다른 시각이 있다.
포도원 주인은 로마 황제, 농부들은 유대인들이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도시들이 불타고, 수천 명의 청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여자들은 노예로 팔려갔고.
예수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분노가 끓어 넘쳐도, 폭력으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억압과 착취에 대한 분노는 필요하지만, 폭력으로 맞서면 더 큰 폭력에 짓눌리게 된다. 싸우되, 폭력 없이 싸워야 한다.” 예수의 비폭력 투쟁 메시지가 딱 이거다. 그는 자신이 잡혀가 죽더라도 무장봉기를 하지 말라고 경고한 거다.
이후 역사에서 보듯, 예수의 경고는 예언이나 다름없었다. 서기 66년, 유대인들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됐다. 유대인들은 학살당하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가고, 대제사장직이나 산헤드린 같은 자치 제도도 강제로 폐지됐다. 이후로 유대인들은 나라 없이 전 세계로 흩어졌고, 1948년에야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한 15년 전쯤, 친구들과 강남역을 지나며 대형교회가 공사 중인 걸 봤다. 친구 한 명이 “저게 xx교회래. 돈을 얼마나 긁어모았으면 저렇게 큰 건물을 짓겠냐?”라고 했다.
"장담하는데, 저 교회 목사는 하느님 안 믿어.” 내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목사가 하느님 안 믿겠어?” 다른 친구가 말했다.
“진짜 하느님 믿는다면, 신도들이 어려운 살림에서 낸 헌금으로 저런 건물을 짓겠냐? 그냥 예수 장사하는 거다. 와! 저건 바벨탑이다.”
다른 해석을 소개한 이유는 독자들이 기독교지도자들의 설교에 더 이상 속지 않기를 바라서다.
예수는 사랑이자 비폭력 투쟁의 아이콘이다. 독자들이 진짜 예수를 알게 되어 풍요와 행복이 넘치는 삶을 누리길 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바랐던 것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