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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Apr 09. 2023

여자친구는 잘 지내?

불시착한 이래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

얼마 전 친구와 술을 마시는데 문득 여친 얘기가 나왔다. 여자친구는 어떻게 지내? 잘 지내?


난 여자친구에 대한 안부를 받으면 대체로 잘 지낸다고 대답한다. 서로 멀어질 대로 멀어져 이별이 코앞에 닥쳐서 오늘내일하는 상황에서도 그냥 잘 지낸다고 대답하는 편이다. 나중에 헤어지게 되어도 누가 묻지 않으면 딱히 먼저 털어놓지 않는다. 누가 물어보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으니 그제야 얘기를 하긴 하지만 왜 헤어졌는지는 역시 잘 말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나 여친이랑 헤어질 거 같아. ㅠㅠ' '헤어졌는데 다시 잘해보고 싶어. 어쩌지? ㅠㅠ' 맘 졸이며 안절부절못하던 지난한 시절이 켜켜이 쌓이고 나니 친구든 누구든 타인에게 하소연해 봤자 기적 같은 솔루션이 나오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왔기 때문이다. 또 굉장히 높은 확률로 여친을 (헤어진 후라면 전 여친을) 뒷담화하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기에 웬만하면 그냥 말을 아끼는 편이다. 어쩌면 내 친구들이 대부분 여친이나 와이프에 대한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하지 않는 편이라 나도 점점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이혼한 어떤 친구는 벼랑 끝에 몰려있던 부부관계에 대해 일언반구 없다가 이혼을 하고 한참 후에야 얘기를 했었다. 그럼 나도 그러려니 한다. 언제나처럼.


그날도 친구에게 어김없이 잘 지내. 라고 말하던 중에 불쑥, 이런 얘기를 했었다.


‘처음부터 나랑은 엄청 다른 사람이어서 그런지 이제 연애한 지 3년 정도 되어가니까 웬만한 건 그냥 그러려니 해.’


말하고 나니 그렇다. 그동안은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은 여자를 종종 만나왔는데, 처음에는 취향도 맞고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이 잘 맞아 재밌기도 하고 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연애 기간이 길어질수록 아무리 비슷한 사람끼리도 결국 서로 다른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여러 방면에서 갭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우린 서로 닮았어. 라며 시작한 관계여서 그런지 이게 적응이 잘 안 되는 거다. 서로 다른 지점이 있는 게 사실 당연한 건데 사소한 부분에서도 실망감이 더 크게 느껴지면서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는다. 지난 연애를 돌이켜 보면, 이별의 이유는 드라마틱한 사건보다는 아주 작은, 너무 작아서 이 정도는 그냥 지나쳐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던 터무니없이 작은 균열에서부터 비롯됐다.


그러고 보면 내 여자친구는 시작부터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는데 연애초기엔 이 간극이 너무 커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고민도 참 많이 했었다. 근데 그 시간들을 함께 겪고 함께 채워가며 지금에 오니, 이젠 조금 다른 의견이나 다른 생각이 순간순간 툭툭 튀어나와도 아주 당연한 일상으로 여겨진다. 원래도 그랬으니까. 이보다 더 당혹스러운 낯섦도 많았으니까. 이 정도쯤이야.


처음엔 우리 연애의 내공이 깊어졌다고 생각했다. 렙업이 좀 됐구나. 하지만 이 내공은 나와 내 여친에 국한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다름에 꽤나 관대해진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이 다름이라는 게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단체 카톡방에서 고백받는 게 낫냐, 사람 많은 핫플에서 고백받는 게 낫냐, 뭐 이런 수준이라면 그냥 취향 차이라고 여기고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가치관이나, 옳고 그름의 기준이나, 정치적인 스탠스 등 딥한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누구나 민감해지기 쉽고 자기도 모르게 타인의 다름을 재단해 버리기도 쉬워진다. 나 역시 40대가 되면서 딱딱하게 굳어가는 나 자신을 느낄 때가 많은데, 그런 와중에도 타인의 다름을 존중해 보려 애쓰게 되는 것은 내가 열심히, 그리고 기꺼이 헤아려보고 싶은 타인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 곁에 있는 타인도 날 헤아리기 위해 속 시끄러웠던 나날들이 많았을 것이다.


내가 아닌 타인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똥줄 빠지게 노력하는 관계란 세상에 많지 않다. 그중에 최고봉은 내 생각엔 육아 같다. 왜 우는지. 배가 고픈 건지. 어디가 아픈 건지. 말도 못 하는 애를 이해하기 위해 손짓 발짓 온갖 짓을 동원하는 부모의 고군분투는 눈물 겨울 지경이다. 아마 부부 관계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육아와 결혼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케이스를 제외하면 타인을 열심히 이해해 볼 수 있는 가장 깊이 있고, 가장 흔한 관계는 아마 연애일 것이다.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깊이 이해해 본다는 것은 나의 세계를 넘어서 또 다른 우주에 착륙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그렇게 넓어진다.


요즘 다양성의 존중이 마치 트렌드인 듯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큰 사단이라도 날 것처럼 유난이지만, 나 역시 타인의 다름을 존중하려 노력은 하지만, 개인적으로 모든 다양성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다양성이 만능키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람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성도 다 제각기 다르므로. 다양성에 휘둘리며 살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선택하고 나를 선택해 준,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또 다른 작은 우주한테는 좀 휘둘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불시착한 이래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 라고.

아, 참고로 바로 전에 다른 여자(한지민)에 대해 썼다고 부리나케 이런 글 쓴 건 절대 아님.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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