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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Aug 18. 2023

쇼핑과 게임의 도원결의

그들을 이어주는 노오력

여친은 쇼핑 중독자다. 그나마 오프라인 쇼핑은 어떤 품목의 어떤 요소를 확인할 것인지 미리 계산을 마친 상태에서 신속, 정확, 효율적으로 스캔하고 오는 편이라 다행스럽지만, 온라인 쇼핑은 그녀의 장바구니에 들어있는 제품 수량만 세어봐도 이게 소비자의 장바구니인지, 본인이 쇼핑몰을 하나 운영하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방대하다. 통화를 하는 와중에 '내가 오늘 뭘 봤는지 알아?'라는 멘트가 시작되면, 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냥 생각 없이 듣기만 하면서,


그녀 - 이거 퀄리티에 비해 너무 비싸!!! 짜증 나!

나 - 짜증 나아~

그녀 - 솔직히 브랜드 빨 아냐, 이거? 맘에 안 들어.

나 - 맘에 안 들어~

그녀 - 이번에 50% 세일이래! 놓칠 수 없엇!!!

나 - 놓칠 수 없구나~


이런 대충 어미만 따라 하면 되는 그런 쪼렙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그녀는 그날 본 수많은 옷과 액세서리들을 카톡에 우르르 링크 보내고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들에 대해 질문하며 적극적으로 날 토론에 참여시키기 때문에, 난 그 링크를 하나하나 들어가 보고 색깔이나 옷감 등을 확인해야만 적확한 대답을 할 수 있다. 대충 보지도 않고 흰색이 좋은데? 했다가 그녀가 보여준 제품 중에 흰색이 없으면 의도치 않게 대화 중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될 수 있다.

그녀가 그 제품을 이미 샀는지 아닌지의 여부도 중요하다. 아직 사지 않았다면 설득의 여지가 있지만, 이미 샀고 착용해 봤고 맥락상 맘에 들어하고 있다면, 대체불가능하고 유일무이한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해야 한다. 어차피 패션감각이야 나보단 여친이 훨씬 좋으니 내 눈에 좀 이상해도 딱히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 30~40분 쇼핑에 대한 얘기가 끝날 때쯤, 마지막으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소비였다고 자평해 줘야 이 대화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그것이 세일기간에 쿠폰도 먹여가며 알뜰하게 쇼핑을 했다는 이 대화의 극적 절정이자 구매자의 카타르시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기승전결을 띄엄띄엄 넘어가지 말고 꼭 찝어줘서 해피엔딩을 내줘야 어중간한 열린 결말을 피해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


그렇게 여친의 해피타임이 끝나면 이번엔 내 차례다. 난 오늘도 어김없이 접속한 내 온라인 세상에서의 종횡무진 활약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의 비루한 레벨로는 얻을 수 없는, 절대 꿈도 꿀 수 없는 전설적인 선원을 뜻밖의 만렙 귀인을 만나 손에 넣게 된 득템의 역사, 게임 안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제일 빠른 나의 배를 타고 (이름은 블랙펄이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가르며 각지에 흩어진 외로운 섬들의 마음을 얻어낸 대항해시대, 인류를 위협하는 교활한 악당들을 두 시간의 치열한 사투 끝에 눕클한 (눕클이란 내가 죽어서 누워있는 동안 살아남은 동료 파티원이 대신 보스를 클리어해 줬을 때, 누워서 클리어했다는 말의 준말) 영웅적 대서사시. 그렇게 가슴이 옹졸해지는 나의 모험담을 듣다 보면 여친이 말한다.


‘자기, 이런 기분이었구나. ㅎㅎㅎ’


그렇게 우리는 서로 해피한 취미를 공유하는 시간이 적절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말하는 사람도 신나고, 듣는 사람의 리액션도 고갈되지 않을 정도로 딱 알맞게.

만약에 상대의 취미가 나에게 노관심이라고 해서 각자의 취미생활에 대해 서로 일언반구 없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나에게 관심 없는 모든 이야기가 배제된 우리의 수다는 재밌었을까. 이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녀를 삐지게 만들면 된다. 삐지면 심통 나서 눈코입이 잔뜩 모여 뚱하니 아무 말도 안 하기 때문에 이때 전화하면 아주 삭막한 정적을 느낄 수 있고, 쇼핑 얘기로 귀에서 피가 나던 순간을 그리워하게 된다.


난 사실 여친의 쇼핑 얘기가 여전히 재밌진 않다. 내가 재밌는 건 별 거 아닌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그녀의 모습인 거 같다. 아마 그녀도 일주일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전설카드를 득템 했다고 기뻐하는 날 보며 그럴 것이다. 그녀에게 전설카드 따위가 무슨 흥밋거리가 되겠는가. 

매일매일 함께 쇼핑해 줄 순 없어도, 나를 따라 pc방에 올 순 없어도, 그렇게 서로의 모든 취향을 함께 하지는 못해도, 들어주는 노력 정도는 할 만했던 모양이고, 아무래도 우리의 대화는 그런 소소한 노력들이 모여 풍성해진 것 같다. 아마 이런 노력은 연인 관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가족끼리든 친구끼리든 너무나 친하고 당연히 소중하다는 대부분의 관계 역시 의외로 유지비용이 필요하다. 어느 한쪽의 노력이 중단되면 소중한 관계는 언제든 기다렸다는 듯 희석되니까. 그런 걸 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엔 인력보다 척력이 더 강한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노력하는 법을 배운다.




이 글을 보고 아, 쇼핑 얘기를 더 많이, 더 오래 해줘야징. 라고 혹시나 그런 귀여운 생각을 하고 있다면, 쇼핑 얘기와 게임 얘기는 별 수 없이 비례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심심한 위로를 전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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