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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에서 살아가기 Oct 22. 2021

캐치볼 03

2인실이었으나 맞은편 침대에는 환자가 입실하지 않은 듯 하늘색 모포가 반듯하게 개어 있었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냐.”    


수염이 문제가 아니었다. 항암치료 탓에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 올은 그마저도 힘을 잃어 헝클어진 채였다. 짙은 파운데이션이라도 바른 것처럼 눈두덩 주위는 변색되어 있었다. 조혈모세포 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수진이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건 불과 보름 전이었다. 시간으로 치자면 200시간 남짓. 지난 200시간 동안, 수진은 두 개의 대학에서 여덟 시간의 강의를 하고, 두 개의 잡지에 1600매 분량의 정기칼럼을 쓰고, 한 시간 반짜리 라디오 방송을 녹음했다. 수진이 나름대로의 삶을 도모하던 그 시간 동안, 죽음은 아버지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태연을 가장한 채 수진은 미리 끓여온 버섯 물을 냉장고 채워 넣었다.    


“소식 들었지? 태형이 말이다.”    


냉장고 문을 닫으려다 말고 수진은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억해요?”    


“뭐를?”    


“그 애요.”    


“네가 가출했을 때 한 번 찾아왔었다.”    


수진으로써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수진은 저도 모르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너 찾아다니던 중에.”    


더운 열기가 수진을 휘감았다. 이미 십 년도 저 지난 일이었다. 아버지는 모포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리깔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널 좋아했던 것 같더구나. 내가 느끼기엔…….”   

 

아버지는 뒷말을 삼켰다. 수진 역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은 거냐?”

   

아버지가 고개를 올려 수진을 바라보았다. 수진은 시선을 피한 채 티슈를 뽑아 냉장고 안을 닦기 시작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몸은요?”    


“좋아. 내 걱정은 마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선 탁자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수진에게 건넸다. 투박하고 거친 손에 들린 건 야구공이었다. 기아 타이거즈 이상진 선수의 사인 볼이기도 했다. 엉거주춤 공을 건네받은 수진은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짐 옮기면서 찾았다. 너 이 사람 팬이었잖아.”    


그 말이 전부였다. 피곤하다며 침대에 누운 아버지에게 수진은 어떤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좀 더 강한 악력으로 야구공을 쥘 뿐이었다.    

    

병실을 나서 주차장에 도착하고서도 수진은 아무런 동작도 취할 수 없었다. 시트에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 몸이 붕 뜬 것 같았다. 중력이 사라진 세상에서 텅 빈 고무풍선이 되어 한없이 가라앉다가 잠시 멈추다를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수진은 잠시 죽음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태형은 죽었고 아버지는 살아 있다. 지금은 살아 있지만 머지 않아 죽음이란 단어가 아버지의 이름 위에 새겨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수진은 아마도 살아 있을 것이다. 태형을 떠나 보내고,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그래도 계속해서 살아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수진을 서늘하게 했다.    


수진이 죽음 다음으로 떠올린 단어는 화해였다. 죽음과 화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묘하게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애써 피해왔던 단어들이었다. 막상 아버지에게 죽음이 닥쳐오니까 마음이 성급해져서일까. 타이밍을 놓쳐 영영 죄책감에 힘들어할까봐 그게 두려워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평온하던 일상에 난데없이 끼어든 태형의 존재 때문일까. 수진은 고개를 들어 백미러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서른한 살의 수진은 제 모습에서 열아홉의 여름날을 기억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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