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결제의 목적

물건을 쓰려고 사놓고 안 씁니다...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서 헐레벌떡 루테인 영양제를 주문했다. 그리고 루테인을 산 걸로 이미 시력이 회복된 것처럼 매일 안 챙겨 먹고 있다.





내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은 아니다. 내가 최근에 산 불쌍한 물건들도 모조리 비슷한 운명에 처해졌다.


루테인: 황급히 사놓고 잘 안 먹는다.

과일: 건강 챙기려고 사서 냉장고에 방치한다.

치실: 여태 안 쓰다가 이제 써야 할 것 같아 샀지만 몇 번 안 썼다.

온라인 클래스: 아이패드 드로잉 배운다며 나름 거금을 결제했지만 미루기만 한다.

영어문제집 그리고 한자 문제집: 아니, 이런 건 대체 왜 샀는지??? (어이없음)


이 정도면 병이 아닐까? 왜 자꾸 바보 같은 짓을 하는가? 그건 결제하는 순간 어떤 마법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결제와 함께 모든 것이 해소되는 마법... 사기 전까진 꼭 필요한 물건인 것 같은데 결제를 하는 순간 모든 욕구와 필요가 해소되어 마치 영어책을 산 것만으로 영어공부 끝난 기분이 된다. 물건을 들고 집으로 오는 동안(혹은 물건이 집으로 배송되는 동안) 흥미는 빠른 속도로 줄어 며칠 후 0에 수렴한다.


트위터에는 아이패드의 용도에 대한 유명한 격언이 있다.



나도 아이패드는 여러 생산적인 일을 하겠다는 핑계로 샀다. 그렇게 ‘아이패드 사고 싶어 병’을 치료한 뒤 유튜브 기계로 잘 쓰고 있다. 우리 아빠는 아플 때 병원은 잘 가는데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은 끝까지 잘 안 먹는 괴벽이 있다. 엄마는 그럴 거면 병원에 왜 가냐고 비난하는데, 추측컨대 아빠는 의사의 처방을 받고 집에 돌아오면서 이미 치료가 된 기분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수없는 반복 끝에 이젠 나도 나를 잘 안다. 어떤 물건을 살까 말까 고민하면서 이미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똑같은 함정에 매번 빠진다. 안 사고 참으면 된다고? 그게... 네. 그러게요. 아니 근데 결제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물건이 세상에서 제일 필요하거든요!


나: 임마 너 지난번에 산 책 안 읽었잖아.

나: 이 책은 다른데? 이거 봐 엄청 재밌어. 나한테 진짜 필요한 내용이야.

나: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거든?

나: 아냐 이건 진짜 끝까지 읽을 거야. 안 읽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2주 뒤)

나: 야 손가락 갖고 와.





내가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사자마자 곧 안 쓰게 된 물건들은 결국 다 잘 쓰기 위해선 일정한 노력을 요하는 것들이다. 사다 놓은 과일은 깎아 먹어야 하고, 온라인 클래스는 꾸준히 들어야 하며, 루테인은 매일 잊지 않고 챙겨야 한다. 책을 샀으면 끝까지 읽는 노력이 필요하며, 식물을 샀다면 때맞춰 물을 줘야 한다. 그래, 문제는 소비는 하고 싶지만 노력은 하기 싫은 마음이다.


만약 이런 사태를 해결하고 싶다면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은 두 개다. 첫째, 노력이 귀찮으면 사지 않는다. 둘째, 샀으면 잘 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여기 세 번째, 히든 해결책이 하나 더 있다. 우린 이걸 ‘금융 치료’라 부르기로 했다. 사고 싶어서 그냥 사는 거다!! 결제의 목적이 소비 그 자체가 되면 결제와 동시에 목적이 달성된다. 그 이후의 노력 여부는 상관이 없다. 나의 경우엔 아이패드가 그랬다. 생산적인 일들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 비싼 가격에 대한 저항감을 낮추기 위한 속임수였지 실상 진짜 목적은 아이패드 결제 그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나의 무의식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뭐 어때. 난 지금 이걸로 유튜브를 보든 트위터를 하든 상관없이 아이패드를 샀다는 걸로 만족 중이다. 이 소비는 성공이다. 후후후.


아무튼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나는 늘 결제와 함께 모든 게 해소되는 마법 앞에서 실패를 반복한다. 나의 열정은 늘 신기루와 같고 성공은 요원하며 소비는 늘 나와의 협상 과정이다. 그나마도 내가 두 진영으로 나뉜 것은 다행인 점이다. 한쪽에서 으름장을 놓다 보면 어느 날인가 또 반성하고 루테인을 챙겨 먹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또 게을러지겠지만. 조만간 내가 야단을 치면 다시 좀 노력을 해보겠지… 결제의 마법 앞에서 이랬다가 저랬다가 참 오늘도 바쁘다.


아무튼 오늘은 루테인 먹을 거다. 치실도 꼭 쓰고 잘 예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인생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