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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될 순 없어서

남들에겐 쉬운 일이 왜 나에겐 이다지도 어려운지

바야흐로 ADHD가 장안의 화제다.


그 덕에 사실 나도 1년 전 경증의(?) ADHD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과 관련한 지표들이 모두 좋아져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일상의 루틴을 좀처럼 잘 잡지 못하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이 ADHD 검사를 권했다. 내가 자주 일을 미루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패턴을 바로잡지 못하는 게 아무래도 도파민이 부족의 문제인 것 같다고 했다. 도파민은 실행력, 추진력, 집중력과 관련한 신경전달물질이다.


검사 결과, 심하진 않지만 딱 진단이 가능한 수준의 점수를 받았다. 이를테면 20점 이상이 ADHD 진단 기준이고 심한 경우 40~50점이 나온다 치면, 나는 21점 정도 나온 셈이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안 나지만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건 진단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점수예요. 꼭 병명을 하나 더 얹는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니까요. 심하진 않아서 그냥 본인이 이런 성향이 있다는 걸 스스로 알고 노력하면서 루틴을 잡아볼 수도 있고요. 약을 먹어서 조절해보고 싶다면 진단하고 약 처방도 해줄 수 있는 점수예요." 선생님은 꼭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 진단명을 하나 더 얹을 필요가 없다는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우울증 약 중에서도 도파민 분비에 작용하는 약이 있다며 그 약을 처방해 주었다. ADHD 약과 기제가 비슷한 약인데 우울증 약으로도 쓰이는 약. 하지만 그 약은 서방정이었고, 서방정의 긴 약효 시간 덕분에 밤에 잠이 안 오는 일이 생기자, 그다음 진료 시간인가 결국 나는 ADHD약을 처방받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경증의 ADHD 진단 환자가 되었다.



내 사회생활, 무사했던 이유...?


요즘 ADHD의 특성과 증상, 그로 인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들에 대해 설명하는 콘텐츠가 넘쳐나고 있으니 나도 거기에 무슨 말을 더 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일을 미루고, 시간 개념이 희박하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자주 깜빡깜빡하는 특성으로 잔잔히 고통받으면서도 사회생활에서 크게 문제가 불거진 적이 없었던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ADHD의 불행한 특성들을 껴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책임감이 강하다. 이것은 신이 나에게 준 불행한 선물세트와 같다. 말하자면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을 어려워하지만 사회적 체면이 중요하기 때문에 필요한 상황에는 꾸역꾸역 성실하게 시간을 지키고 일을 하고 마감을 지킨다. 덧붙여 학창시설을 생각해 보면, 책임감에 더해 타인의 시선을 굉장히 많이 신경 쓰고, 권위(=선생님)에 약한 타입이었던 것도 나의 무난한 학교 생활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던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은 이걸 차력쇼와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겉으로 보기엔 큰 문제가 없지만 일을 제때 하기 위해 나 혼자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빨리 지치고... 번아웃이 오고... 잘못하면 우울증도 겪고... 그런 아니었을까.



책임감이 필요 없을 때는 폭망


하지만 이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런 뜻이다. 나는 사회적 책임감이 작동하지 않을 때, 할 일을 미뤄도 체면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때, 그러니까 이걸 당장 안 해도 큰 봉변을 당하지 않을 때, 무한히 게을러지고 생활 루틴이 엉망이 된다는 뜻. 그게 언제냐면... 바로 지금이다. 2년 전 퇴사 후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하는 강제력이 없어졌고, 희곡 안 쓰면 공연에 차질이 생기는 큰 마감은 1년 전에 끝났고, 혼자 살고 있어서 나의 한심한 하루를 감시하는 타인의 시선도 없다. 지난 1년 동안 솔직히 쓰레기처럼 살았다.


그렇다고 생각이 없었던 아니다. 이렇게 쓰레기처럼 살면 건강도 망치고 커리어도 망치고 종래에는 인생 전체를 망치게 된다는 생각은 늘 한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생활을 교정하지 못하는 나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현타와 각성, 결심과 패배,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의 단짠단짠 인생.


아참, 약은 어찌 되었냐고? ADHD는 약을 먹으면 확실히 좋아지는 이긴 하다.

그런데 나는 ADHD약만 먹으면 설사를 한다. 이 부작용에 적응을 못해 약을 여러 가지 바꿔보았지만 똑같았다. 정말 괴롭다. 몇 시간 동안의 집중력과 실행력을 얻고 설사를 좀 하거나, 조용한 장(腸)을 얻고 그날의 실행력을 잃거나, 둘 중의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약을 자주 먹진 못하고 정말 당장 급한 일이 있을 때(!)만 약을 먹고 (화장실을 몇 번 들락거린 후) 급한 일을 해치운다. 솔직히 부작용 없이 약만 매일 먹을 수 있었다면 일상 난이도가 조금은 더 쉬워졌을 것이다. 젠장.



내가 11시에 일어나면 히틀러다


그러다 어제는 트위터에서 우연히 히틀러에 대한 트윗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히틀러는 엄청나게 게으르고 무능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출처: @inleminati (https://x.com/inleminati/status/1692111866137555420)


히틀러는 늦게 일어난다. 할 일을 안 한다. 글을 읽기 싫어서 업무 문서조차 안 읽는다. 게으르고 무능력하다.

Q.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가?

A. 내가... 내가 히틀러처럼 살고 있다니! 내가, 내가 히틀러라니!!!


그래서 나는 즉시 트위터, 그리고 인스타에 "히틀러 얘기를 보고 현타를 맞았으며 아무리 그래도 히틀러처럼 살긴 싫어서 내일부터 미라클모닝을 하겠다"라고 선언하는 게시물을 올렸다. 저녁엔 친구를 만나서 또 히틀러 얘기를 하고 가족들 단톡방에도 올렸다. 내가 이제 오전 11시에 일어나면 히틀러다.


미라클 모닝은 장난이었지만(야간형 인간은 새벽에 일어나면 하루를 살 수 없음) 적어도 아침 9시에 일어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이번주부터 9시에 일어나는 연습을 하고, 좀 익숙해져서 한 달 뒤엔 8시에 일어나기를 시도해 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이 마침 월요일이니 월요일부터 중요한 이것저것의 일을 처리하고... 그러면 나는 부지런해지고... 매일매일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그리고 이러한 각성과 계획과 다짐의 결과,

나는 오늘 김히틀러가 되어서 오후 1시 40분에 일어났다. 히틀러도 일과가 있을 땐 11시엔 일어났다는데 난 1시 40분에 일어났으면 히틀러보다 더한 인간이 된 것이 아닐까? 나는 김히틀러히틀러가 되었다.



빌어먹을 김히틀러히틀러의 다짐


남들에게 쉬운 일이 나에겐 왜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 되는지. 나는 정말 너무 슬프다. 이렇게 살고 있는 나, 남들은 작심 3일이라도 한다던데 작심 1일도 못하는 한심한 나, 내 손으로 내 인생을 쓰레기처럼 흘려보내고 있는 나 자신을 위해서 슬퍼한다.


그래서 가뜩이나 늦게 일어나서 하루가 날아간 오늘, 얼마 없는 시간을 쏟아부어 브런치에 이런 글을 쓴다. 누가 볼까 싶지만 그래도 누구든 볼 수 있는 오픈된 공간에 글이라도 쓴다면 내가 조금이나마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을까. 조금이나마 계획을 지키려는 억지력이 생기지 않을까. 이런 행위가 조금이라도 내 일상을 제자리로 돌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포기는 않겠다. 이번 주는 아침 9시에 꼬박꼬박 일어나는 연습을 하고, 당장 해야 할 일의 목록도 작성해 보고, 할 수 있는 일을 해치우고, 내 일상이 어디서부터 제일 망해가는지 분석도 해보면서 지낼 것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은, 이런 연습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쯤 브런치에 돌아와서 경과 보고도 하고 내 고장 난 루틴을 고쳐가는 것이다.


빌어먹을 김히틀러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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