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실패하는 히틀러 탈출기
4월 초 <히틀러가 될 순 없어서>를 브런치에 올리고 며칠 뒤, 내 친구 너굴맨에게 카톡이 왔다.
"김의 글과 트위터가 너무 인상 깊게 남은 관계로 이제부터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본다."
<너굴맨의 히틀러 계산법>
- 오전 9시 기상: 0히틀러
- 오전 11시까지 기상 못함: 1히틀러
- 오후 1시까지 기상 못함: 2히틀러
- 오후 3시까지 누버있음: 3히틀러
나는 물었다.
"선생님 그럼 9시에 눈뜨고 10시 반에 침대에서 일어난 사람은 몇 히틀러인가요?"
"1히틀러. 10시 전이었으면 0.5히틀러."
"히틀러 여부는 눈 뜨는 것과는 상관이 없군요. 침대에서 일어나야 히틀러 탈출이군요."
"그렇습니다. 눈만 떴다고 해서 다 일어난 게 아니란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너굴맨은 왠지 해병대 교관 모자를 쓰고 있을 것 같았다.
그 후로 며칠간 단톡방에서는 히틀러 계산법이 실시되었다. 그래봤자 3명뿐인 단톡방이지만 우리는 각자의 오늘 계획, 이를테면 집청소, 화장실 청소, 분리수거, 필라테스 가기, 건강검진 예약하기 등의 계획을 카톡방에 공유하며 어딘가에 공표하지 않으면 나 자신과의 약속을 도저히 지킬 길이 없는, 아니 지키리라 기대조차 이젠 없는 우리들 자신의 박약한 의지를 다시 한번 다잡았다.
예를 들어
김: 화장실 청소를 뿌시고 선풍기도 닦고 왔습니다. 히틀러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
박: 오. 그럼 0.2히틀러쯤 되는 거야?
김: 잉... 0.2는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박: 1히틀러였는데 오전 스케줄을 이행했고 청소까지 했으면 -5히틀러쯤 괜찮지 않을까? 너굴맨의 결재가 있어야 함.
너굴맨: 히틀러지수에 마이너스는 없어요 여러분.
박: 그렇대.
너굴맨: 오로지 기상시간으로만 쌓이는 점수!
박: 관대하지 못한 시스템이네
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독재다. 진정한 히틀러다.
-
박: 저 오늘 6시 반에 일어낫서요
너굴맨: 벤자민프랭클린지수 2 드리겠습니다.
김: 그 자식은 일찍 일어났대?
박: 이 와중에 그 자식이래 ㅋㅋㅋㅋㅋ
너굴맨: 몰라 그냥 떠올랐어
김: 엉터리다! 독재다!
-
히틀러 계산법으로 하는 장난은 며칠 후 단톡방에서 시들해졌지만 난 생각했다. 이건 웃기니까 글로 써야지. 사는 건 너무 성가신 일이다. 루틴 교정을 하려고 하지만 되는 일도 없고 갈수록 짜증만 난다. 그럼 뭐 웃기기라도 해야 될 거 아니여.
콜 미 김히트
너굴맨이 0~3히틀러 측량법을 마련해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히틀러히틀러 표현법을 더 자주 사용했다. (뭐 사실 크게 다를 바가 없다. 1은 히틀러, 2는 히틀러히틀러.) 어느 날은 10시 30분에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1히틀러에서 약간 모자란 0.8히틀러 정도가 되었다. 그날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9시에 일어났지만 너무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아서 1시간 반이나 누워 있다가 침대에서 몸을 뜯어냈다. 그래도 히틀러는 11시에 일어났다던데 난 10시 반에 기상이면 김히트... 정도가 아닐까"
그래서 김히트는 나의 새로운 호칭이 되었다. 나를 김히트라고 부르는 사람은 너굴맨도 박도 아닌 제3의 친구인데, 그는 종종 오전 10시나 11시쯤에 카톡을 보낸다.
"김히트... 일어났나요?"
그럼 나는 주로 오후 1시에 답장을 한다.
"지금 일어났어요..."
김히트가 다시 김히틀러히틀러가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김히트로 불러주는 내 친구는 꽤 너그러운 사람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오전 10시에 일어나 내가 먼저 카톡을 보냈다. 대뜸 "김!"이라는 답장이 왔다. 그냥 부르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일찍 일어났다고 0히틀러를 적용한 것이었다. 나는 날마다 9시에 일어나 제로히틀러의 삶을 사는 친구가 부러웠다. 제로히틀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품 성분 함량 표시 마냥 히틀러히틀러 표현법이 세분화되었다.
김 / 김ㅎ / 김히 / 김힡 / 김히트 / 김히틀 / 김히틀러 / 김히틀러히틀러 / 김히틀러히틀러히틀러
사실 10시에 일어났으면 '김힡'이 되어 마땅한데 대충 "김!"으로 퉁쳐주다니 다시 생각해도 내 친구 관대하다.
중간보고
한심한 삶을 청산하기 위해 글을 쓰긴 했지만, 사실 그 효과는 한 2주 정도 갔다. 아니 그것도 길게 봐서 2주다. 정말로 9시에 일어난 건 다 합쳐도 일주일 정도였다. 그렇게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니 피로가 누적되었고, 그 피로는 계속 풀리지 않았고... 그 뒤로는 기상시간이 점차 뒤로 밀렸고...
정신을 차리니 5월이고 나는 다시 제자리다.
그래도 공개적으로 글을 썼으니 중간보고를 하자면, 내가 4월에 한 일은 두 가지다.
1. 게임 삭제
한 달 전까지 나는 네모네모로직이라는 게임에 빠져 있었다. 비싼 아이패드 사서 그걸로 네모네모로직이나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았을까. 네모네모는 그만큼 하찮은 게임이다. 나는 그걸 하루에 7시간씩 했다. 7시간이라는 건 과장이 아니다. 어느 날 이건 좀 심한 것 같아서 스크린타임을 확인했다가 내가 목격한 숫자였다. 하루에 7시간을... 눈알이 빠지도록... 네모네모로직...
나의 게임 중독 역사에 대해 말하자면 할 말이 많지만, 대충 요약하면 나는 대체로 하찮고 한심한 게임에 많이 중독됐다. 타일 맞추기류(애니팡, 프렌즈팝, 겨울왕국 프리폴), 농장 키우기류(헤이데이, 꿈의 집), 퍼즐류(네모네모로직, 지뢰 찾기, 스도쿠, 테트리스), 카드게임류(솔리테리어, 스파이더) 게임들을 좋아했고 이 게임들에 한 번씩 심각하게 중독되었으며, 그때마다 일상생활에 현저한 지장이 초래됐다. (직접 써놓고 보니 중독된 게임이 너무 많아서 현타가 온다.)
최근에 책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ADHD 환자가 생체 시계 조율이 어렵다는 점이 시간의 흐름을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내부 생체 시계가 잘 '설정'되어 있지 않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들은 '지금'과 '지금이 아님'이라는 두 가지 상황만 경험합니다.
- 안주연, <어쩌면 ADHD 때문일지도 몰라>, p.144
악. 누가 내 얘기 하잖아?
'지금'과 '지금이 아님'의 시간관은, 내가 각종 게임에 빠져 일상을 망쳐 온 과정을 꽤 잘 설명한다. 나에게는 시간관념이 정말로 '지금'과 '지금이 아님'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항상 나의 안중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의 즐거움 뿐? 그래서 내일 중요한 일이 있든 말든 잠을 못 자서 내일을 망치든 말든 후회를 하든 말든 자기혐오에 빠지든 말든 지금 하는 게임이 너무 재밌으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원래 우리의 전전두엽은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 좋도록 마음속 시간 여행을 떠나게 해줍니다. 지금 이 일을 하기 싫지만, 이 일을 했을 때 받을 보상을 상상하고, 안 했을 때 받게 될 손해를 그려보면서 실행할 수 있는 동기와 의지를 얻게 하는 거죠. 그런데 전전두엽의 활성도가 낮은 ADHD인들은 이런 심금을 울리는 근미래 상상이 어렵습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시간이 촉박해 가는 내내 초조하고 힘들 것이고, 늦으면 친구가 화를 내겠지만 그 일이 와닿지 않는 거죠.
- 안주연, <어쩌면 ADHD 때문일지도 몰라>, p.279
나는 사실 이미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다. 밤새고 아침에 취침하는 가장 큰 원인이 네모네모로직이라는 걸. 알지만 앱을 지우지 못한 건 그동안 클리어한 게임 데이터가 날아가는 게 아까웠기 때문이다. 앱은 안 지우면서 내 의지력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게임을 덜 하면 된다고 계속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될 순 없다는 글을 쓰고 이렇게 살지 않겠단 결심을 하자, 결국 앱을 지우지 않으면 루티 교정이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앱을 지웠다. 솔직히 남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스테이지를 깨 놨기 때문에 데이터가 아까웠지만, 게임을 지우고 나니... 덜 괴로워졌다. 약간 구렁텅이에서 나온 기분?
물론 부작용도 있다. 네모네모로직이 사라진 빈 시간을 다른 게임이나 유튜브가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네모네모로직만큼 중독성이 강하지 않아, 놔두고 있다. 그럭저럭 조절 중이다.
2. 알람 설정
이것 역시 '지금'과 '지금이 아님'의 두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는 나의 시간관 때문에 필요했다.
시간관념이라는 게 탑재되지 않은 인간은 혼자 살다 보면, 뭔가 열중하다 보면, 반대로 빈둥대며 할 일을 미루다 보면, 일어날 시간, 밥 먹을 시간, 씻을 시간, 청소할 시간, 잘 시간, 모든 걸 지나친다. 그러다 보니 오후 1시에 일어나 3시에 점심 먹고 9시에 저녁 먹고 새벽 4시에 씻고 새벽 6시에 취침하게 되는 것이다.
4월에 나는 총 6개의 알림을 설정했다.
오전 9시: 일어나
오전 11시 30분: 점심 먹어
오후 6시: 저녁 먹어
오후 7시 20분(해당 요일 한정): 학원 가
오후 10시 30분: 씻어
오후 11시: 약 먹고 잘 준비
가끔은 알람을 무시해서 허무하게 무력화된 날도 많았지만, 그래도 알람이 울리면 생각이라는 걸 하지 말고 시키는 일을 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고, 어떤 날엔 효과가 있었다. 특히 꼬박꼬박 12시에 자러 가진 못해도 11시에 리마인드 해주는 것만으로도 1시간 뒤 자야 한다는 약간의 자각이 생기면서, 또 밤새 뭔가 하려고 드릉드릉하는 나 자신의 엔진을 한 번 끊어줄 수 있었다.
이게 전부다. 내가 4월에 한 것.
히틀러 탈출 절망편 ^^
내가 2주 만에 망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1. 첨엔 꾸역꾸역 일어났으나 피로 누적으로 나중엔 결국 늦잠
2. 4월 중순 외부적인 요인으로 갑자기 일정 꼬임, 할 일이 몰려서 며칠 동안 밤까지 일하게 됨, 당연히 늦잠으로 이어짐
수면시간 교정에 대해 의사들은 말한다. 자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시간이다. 무조건 그 시간에 꼬박꼬박 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강제로 일어나 햇빛을 보자. 그러다 보면 밤에 일찍 잘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 저 마지막 단계가 잘 안 된다. 아무리 꾸역꾸역 일어나서 매일 피곤해도, 밤에 자연스럽게 일찍 자지 않는 날이 더 많다. 회사에 출근할 때도 그랬다. 낮에 좀비처럼 돌아다녀도, 밤에는 갑자기 뇌가 깨어나며(!) 모든 일이 다 재밌어지고(!) 도무지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꾸역꾸역 일어나는 노력과 꾸역꾸역 일찍 자는 양방향의 노력이 필요한 사람인 듯하다.
그럼 1번은 실패하고 실패하다 보면(?) 언젠가 어떻게든 양방향 노력에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2번은 불가항력적이고 좀 치명적이다. 야행성 루틴을 최대한 앞으로 당겨왔는데 한 번만 밤을 새워도 다시 루틴을 되돌리기 힘겹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결국 이건 끊임없이 실패하는 나의 실패담이 되는가.
이것은 히틀러 탈출 절망편의 서막인 것인가!
연구에서 ADHD인의 뇌는 반복된 노력을 습관으로 만드는 힘이 일반적인 뇌보다 약해 훨씬 더 꾸준히 노력해야 습관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지루함이나 반복을 유독 견디지 못하고 새로운 것에만 흥미가 쏠리기에, 연습이나 훈련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의 환장할 콜라보 덕에 ADHD인들은 증상 관리를 위한 일상생활 훈련을 지속하기 어려워서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거나, 목표치를 현실적으로 계속 조정해 가야 할 가능성이...(후략)
- 안주연, <어쩌면 ADHD 때문일지도 몰라>, p.190
김히트. 과연 그의 5월은.
추신: 글 발행하려고 했는데...
아냐... 그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