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그 순간에는 최선~
살아가다 보면 갈림길에 서서 막막할 때가 종종 생기곤 한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그 순간의 선택은 그 길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후회도 미련도 또 다른 감동도 있겠지만 그 선택이 그 순간 최선이었을 것이다. 후회, 미련이 남을지라도 가지 않은 길 역시 또 다른 고민이 있을 것이기에.
나에겐 그것이 결혼이었다. 그 선택의 순간에 무엇을 망설였을까? 사랑, 그건 그 순간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기적 현실 앞이었다. 친정엄마가 반대를 하시기 시작했다.
시골 부자 부럽지도 않고 맏며느리도 버거운데 종갓집이라는 그 길이 주는 무거움 때문에, 결혼 날짜는 받았는데 막다른 길에 서있는 나 자신은 한없이 깊은 수렁으로 침몰되어 가는 참담함을 감당해야 했다. 아버지께서 "땅은 뿌린 데로 거둔다. 모두 다 큰 아들을 피해 간다면 너희 오빠도 결혼을 못했을 거 아니냐. 넌 뭐라 했겠느냐? 사람이 진실하고 능력 있고 진중한데, 큰 아들이라 못하겠다면 네 몫이 아닌 거다." 그 순간 모든 게 대수롭지 않았다.
남편은 자라면서 할머님, 어머님께 공부해서 서울로 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두 분이 고생하시는 게 너무 안타깝고 애틋해서 출세해서 호강시켜 드려야지 생각하며 공부를 했다며 굴레라 여긴 적도, 버겁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자리가 굴레라고 생각한다면 결혼 후에 이민을 생각해보자고 한다. 난 한식체질이고 외국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 가보자, 그 길이 무슨 길인지.
그렇게 난 시월의 신부가 되었고 맏며느리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백화점 퇴사를 하면서 매장 운영권을 가진 매장 매니저가 되었다.
신혼집은 내가 살았던 북가좌동에서 시작을 했다. 항만청 아저씨네 ㅇㅇ언니와는 자매처럼 지내면서 많은 걸 의지하고 살아서 그런지, 외롭거나 힘든 일도 언니가 있어 모든 게 순조로웠다.
퇴근 후 언니가 집으로 찾아왔다. 맞선을 여러 차례 보았지만 아직 결혼 상대도 없고 부모님에 결혼한 오빠랑 사는 것이 때론 올케언니 눈치가 보여서 힘들다고 했다.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일본 둘째 언니가 일본으로 들어오라고 회신이 오고 가고 했던 터여서 나는 "언니, 일본으로 가라."라고 얘기했다. 물론 언니는 두려웠겠지만 일본 둘째 언니가 동경에서 한식집을 운영 중이었고 장사가 잘돼서 믿을 사람도 필요하니 가서 도우면서 공부를 해보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얘기했다. 심지어 언니는 고등학교 수석 졸업자이기도 했다.
언니가 떠나면 당장 내가 많이 외롭고 힘들겠지만 그건 내 이기적 생각이어서 언니에게 진심으로 권하였다.
도쿄로 향하는 언니는 누구도 모르게 가슴속 깊이 눈물을 흘렸다 한다. 도쿄에 정착한 언니는 혹독하리만치 힘든 삶을 살아내면서 고향을 생각하며 언제인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희망으로 버티고 버텼다 한다.
결국 언니는 일본에서 결혼하고 소설'파친코'의 선자보다 더 혹한 세월을 보냈고, 지금은 시아버님 유산을 물려받아 ㄹ이사, ㄴ사외이사 등 한국에 자산을 쌓아 성실하고 착한 막내며느리에게 물려주셨다.
언니를 30년 만에 여의도 63 빌딩서 만났다. 서로 안아주며 눈물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가슴이 저리고 아팠다. 부를 이룬 성공이 과연 언니의 지난한 시절을 보상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언니는 쓸쓸해 보였지만 불행해 보이진 않았다. 지금도 남편과 두 딸들이 일본에 있어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는 없어 한 달에 한 번씩만 한국에 들어온다. 그래도 그것으로도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조국이 있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언니의 삶을 소설로 쓰고 싶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