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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May 04. 2024

홀로, 런던

올해 특별히 아이들은 방학이 아닌 기간이지만 나는 휴가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런던으로 티켓을 끊었다. 물론 이 두 문장을 쓸 수 있기까진 수없이 번복되던 마음들이 있었고, 괜찮으니 다녀오라고 말한 뒤엔 뒤 끝없던 남편의 배려심도 있었다. 그렇게 난 런던에 다녀왔다. 처음으로 가 본 유럽이었고, 처음으로 해 본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여행을 정말 가기로 결정하기까지 그리고 목적지를 정하기까진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가게 될 경우 해 보고 싶은 일들은 매우 명확했다. 최대한 간소하게, 걸어서 갈 수 있는 곳들로만, 이곳저곳 명소를 많이 보진 않더라도 동네 골목골목 돌아다녀 보고 싶었다. 철저하게 혼자 갈 수 있을 때만 가능한, 내 취향만 반영한 일정들로 채우고 싶었다. 3일간의 길지 않은 일정이었기에 런던 시내 한복판은 아예 계획에서 제외했다.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는 곳에서 아등바등 다니다 미처 못 가본 곳들로 아쉬워하며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걸어서 닿을 수 있는 서점과 카페와 예쁜 골목길만 있어도 충분했다. 매일 새로운 곳이 아닌, 너무 좋았다면 다음날 한 번 더 가볼 수 있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Kensington Park의 근처에 숙소를 잡았고, 여행 전 구글맵에 저장한 곳이라곤 세 개의 서점과 한 개의 식당, 두 개의 공원이 다였다.


밤 새 날아 도착한 런던의 아침은 언뜻 보기엔 미국과 다를 바 없었지만, 택시 기사 아저씨는 오른쪽에 앉아 운전을 했고 라디오에선 브리티쉬 악센트가 흘러나왔다. 숙소 앞에 도착하자 아저씨는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주며 나에게 굿 럭이라고 말했다. 그제야 오롯이 홀로 남았음이 확연히 느껴졌다. 이제 이곳에 있는 동안 완벽히 낯선 곳에 혼자라는 점, 우연이라도 나를 알아볼 사람을 만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점, 이제 일 분 일초를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희열에 가까운 자유함으로 다가왔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나와 떠나기 전 유일하게 저장해 놓았던 식당으로 향했다. 골목길 코너에 위치해 있던 작은 식당에 들어가 책을 읽으며 아침을 먹었다. 둘째 날 아침을 먹으며 깨달은 건데 책을 읽으며 식사를 하니 식사가 어떤지 묻는 흔한 질문조차 받지 않았다. 방해한다는 느낌을  주어서일까. 역시 책은 여러모로 매력적이다.  때로는 정중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지켜주기도 하고, 반대로 모르는 사람들과 열띤 대화의 장을 열어주기도 하니까. 식사를 마치곤 서점으로 향했다. 바로 갔다면 20분 안팎의 거리였지만 기웃거리고 싶은 골목이 보일 때마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들어섰다. 적당히 한산한 길들, 잘 가꾸어진 정원들, 예쁜 대문들 보는 재미가 쏠쏠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동네 길들을 들락날락했다. 처음엔 사진으로 찍어 보려다 남의 집 대문 사진들만 100장 넘게 남길 판이라 포기하고 눈으로만 찬찬히 새겼다. 벽을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 나무들,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꽃들, 우연히 지나가게 된 학교 담장 너머로 들리던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들, 지나가는 패셔너블한 어른들보단 더 마음이 가 머물던 엄마와 아이들. 그저 또 하나의 바쁜 월요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로울 수 있음에 우쭐해지던 모습이 유치해서 웃음이 나던 나의 마음들 모두. 그렇게 도착한 서점에선 미국에서 구하기 힘들던 프랑스 작가의 그림책을 혹시나 찾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실패했고, 아이들의 생일 카드와 언니에게 줄 카드를 골라 들고 나왔다. 그다음엔 숙소로 돌아오던 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좀 더 읽었다. 아니, 공원을 먼저 갔던가. 입구가 맞는지 긴가민가 하며 다가선 건널목 너머  길고 곧게 뻗은 가로수길에 흥분해 신호도 아닌 데 건널 뻔했던 순간은 선명하다. 한없이 걸으며 이 공원에 다시 와야지 했던 다짐도.


나는 남은 이틀도 비슷한 일들을 하며 보냈다. 정말이지 갔던 카페와 식당에 또 갔고, 서점들에도 한 번씩 더 들렸으며, 매 번 똑같이 감동했다. 매일같이 골목길을 헤맸으며 그러다 다다른 또 하나의 공원과 작은 뮤지엄에도 갔고, 마음에  꼭 드는 남편과 아이들의 선물을 샀다. 너무 관광지로 유명해졌다며 얕보던 서점에선 그런 나의 얄궂은 허영심을 비웃듯 눈물 쏟게 하는 그림책을 발견해 미국에서 아마존으로 반 값이면 살 수 있었을 그 책을 굳이 두 배를 주고 구입했다. 마지막 날 매일같이 들렸던 공원 벤치에 앉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머무는 동안 식당이나 호텔, 상점에서 주고받은 간단한 대화 이외엔 말을 전혀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만히 채워진 느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일기를 써야지 생각했었다.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게 세세하게 다 써야지라고 생각했으나 있는 내내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다 써야지 했지만 그것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게으름보다는 쓸 수 없었다는 것이 더 맞겠다. 하루하루 느꼈던 벅찬 마음들을 써낼 재간이 없었고, 했던 일들만을 나열하는 식의 기행일기는 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무엇을 했는지, 어디를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여행이었기에. 처음엔 조바심이 일었다. 이러다 다 까먹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니 오히려 이 여행의 묵직한 의미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꼭 해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감이나 의무감 없이,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되지만 그저 내가 해보고 싶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포기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채워나갔던 여행이었다. 여행 중 읽었던 Tom Lake에서 ‘Someone told me years ago that I should always have a place in my mind where I could imagine myself happy, so that when I wasn’t so happy I could go there. Anyway, this is the place I go.’라는 말이 나온다. 나 역시 그런 곳을 하나 더 얻은 기분이다. 온전히 홀로 행복할 수 있었던 그 기억은 지칠 때면 가만히 들어가 앉아 찬찬히 마음이 차오르길 기다릴 수 있는 비밀의 방으로 가슴 한 켠에 자리 잡았다. 나의 마음은 그렇게 더 커지고 단단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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