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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Apr 20. 2024

밤 산책

어제는 남편이 저녁을 하고, 설거지까지 도맡아 준 덕택에 아이들 피아노 연습까지 봐준 후에도 잠시 시간이 생겼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 정말 오랜만에 혼자 걸으러 나갔다.


작년 여름, 정처 없이 혼자 걷던 동네 길들을 다시 걸었다. 걷다 보니 그때는 맨 땅이었던 자리에 어느새 큰 저택이 자리 잡은 걸 발견했다. 아직 마무리 단계가 남은 것 같았지만 어엿한 저택이었다. 일 년 남짓 하나의 집이 지어지는 동안 난 뭘 했을까.


브런치엔 12개의 글을 올렸고, 월간지 에세이 공모전에 세 번 글을 보냈다가 세 번 모두 떨어졌으며, 두 명의 몰랐던 작가들을 알게 되 반해버렸고, 중학교 이후 읽지 않았던 고전을 한 권 읽었으며, 평소 결코 읽지 않았을 책 두 권을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무감으로 읽어냈다 (다른 한 권은 결국 중도 포기했지만). 동네 도서관에 최근 출판 된 한국 책을 신청하면 비치해 준다는 걸 알게 되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고른 책들 열 권 남짓을 들여놓는 쾌거를 이루기도. 그중엔 정말 소규모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도 있었기에 매 번 반신반의 하며 신청하고 정말로 책이 들어온 걸 확인할 때마다 ‘이게 된다고?‘ 혼자 환호성을 지르며 내가 발굴한 신인을 데뷔시킨 듯한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작가님은 절대 모르시겠지. 미국의 아무도 모를 시골 동네 도서관에 본인의 책이 버젓이 비치되어 있다는 것을.


물론 이 외에 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한 일들, 저지르고 후회한 일들은 미처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새 집 한 채가 지어지는 세월 동안 내가 새롭게 한 일들은 너무나 보잘것 없이 느껴지지만, 한 편으론 꾸준히 반복되는 일상들을 살아내지 못했다면 그나마 없었을 일이기도 하다.


지금 막 지어진 그 집은 영원히 새 집일 순 없겠지만, 누군가가 들어와서 살게 되고, 세월의 흔적만큼 낡아지겠지만, 그만큼 그 집주인의 숨결과 취향이 깃든 고유한 집으로 자리 잡으며 그 풍경에 녹아들겠지. 일 년이 또 지난 뒤 다시 그 집을 지나게 될 때 나는 또 어떤 새로운 일들을 지나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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