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 How are you?”
“…”
“Do you speak English?” (영어 할 수 있니?)
“…”
“Hablas Espanol?” (그럼 스페인어 하니?)
“Si” (네)
겁을 잔뜩 머금은 눈망울로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없는
모양새로 들어온다면 백발백중이다. 아이는 아직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른다. 저런 대화가 오고 가면, 내가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줄 알고 막 이제 말이 터진 아이처럼 더 긴 말을 쏟아내지만, 안타깝게도 이젠 나의 말문이 막힐 차례다.
나는 미국에 사는 치과 의사다. 나는 어쩌다 모국어도 아닌, 그렇다고 영어도 아닌, 스페인어로 어린 환자들을 대해야 하는 치과 의사가 된 것일까?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대학 진학과 진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오기까지도, 난 한 번도 내가 의료 쪽으로 직업을 가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심지어 나는 의대를 지원할 수 조차 없던 문과였다. 그러던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고, 난 자연스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워낙 말도 별로 없고, 나서기를 좋아하지도 않았기에 눈치가 트이고, 귀가 트이도록 가장 늦게까지 트이지 않는 건 입이었다. 그렇게 미국 고등학교를 다니며 대학 입시를 다시 준비하게 된 나는 오히려 언어의 비중이 적은 수학과 과학을 잘하는 이과생이 되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한창 꿈을 꿔 볼 시기였지만,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 성적에 맞혀 대학과 전공을 결정하는 방식에 익숙했던 내가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이곳에서 어떤 선택들이 있는지 호기롭게 살펴보긴 쉽지 않았다. 지금 와 생각하면 이곳도 결국 다 사람 사는 곳이거늘, 다른 언어와 문화권이라는 이유로 어떤 직업들이 있는지 그것을 위해 어떤 공부가 필요한지 알아보는 것이 왜 그렇게 막막하게 느껴졌을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려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지만 정작 언어는 나보다도 서투르셨기에 나 혼자 알아보고 결정할 일들이 많았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익숙지 않아서였을까? 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지 싶지만, 열여덟 살의 나는 말이 많이 필요할 거 같은 직업, 그룹 토론이나 발표를 많이 해야 할 거 같은 직업들은 선택지에서 다 제쳐나가기 시작했다. 어렸을때 부터 막연히 꿈꾸었던 ‘선생님’부터 회의와 발표가 많을 거 같은 직종은 죄다 자신이 없었다. 그러자 오히려 그 당시 많은 한국 이과생들이 꿈꾸던 의사라는 직업이 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난 대학에서 프리메드 (pre-med) 과정을 밟고 치대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내내 수능을 앞둔 고 3처럼 엉덩이 힘으로 버티며 공부를 한 결과 치대에 들어가긴 했으나 막상 들어가서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공부 습관까지 제대로 갖쳐진 미국 학생들 틈에서 좋은 성적을 내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진짜 고난은 3학년이 되고 실제 환자를 보면서 시작되었다. 어째서 의사가 되는 것이 말하기의 영역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을까? 치료만 잘해주면 다라고 여긴 것은 순진하다 못해 미련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왜 그제서야 깨달은 걸까? 환자를, 그것도 많은 경우 아픔을 겪고 있는 환자들을 일대일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난도의 의사소통 기술이 필요한 일중 하나임을 그제야 난 알았고, 또 그것이 치료와 별게가 아닌 치료에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요한 한 부분임을 배웠다. 후회하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고, 어떤 이유로 시작되었던 이 일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졸업 후 일을 하면서도 커뮤니케이션에서 오는 갈등은 계속 있었다. 나는 너무 다정하거나 너무 직설적이었다. 외국인들에게 전형적인 동양인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진 나는 이민 오면서 고등학교를 보통 사람들보다 일년 반을 더 다니기까지 했는데도 환자들은 나를 너무 어리게 보며 못 미더워하거나, 아예 몇 살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엔 그것 역시 원어민처럼 자연스럽고 전문적이지 못한 말투 때문인가 하는 열등감에 시달렸지만, 맞다고 나는 천재 소녀였어서 엄청 어린 나이에 치대를 졸업하고 벌써 치과 의사가 되었다고 눙칠 수 있을 정도로 너스레가 늘었을 때쯤, 알맞은 상냥함과 카리스마를 섞어 말을 하진 못해도 치료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진심이 환자들에게 가 닿을 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네가 아닌 다른 의사한테 나의 이를 맡길 순 없다는 환자들이 하나 둘 생겨날 때쯤, 나는 지금의 직장으로 옮겼다.
지금 일하는 곳은 사설 병원에서 의료팀을 꾸려 공립학교 안에 설립한 클리닉이다. 해당되는 공립학교들의 대부분은 다소 위험한 빈민가에 위치하여 있고, 그곳의 학생들은 안타깝게도 받아야 할 돌봄 들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는 경우들이 많다. 그런 학교들에 의료클리닉을 열고 등록된 학생들이 학교에 와 있는 동안 부모님 없이도 필요한 진료들을 받을 수 있게 하여, 궁극적으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계속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 클리닉의 목적이다. 나의 환자들은 모두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고, 영어를 거의 못 하는 학생들도 꽤 있다.
“Me…la denitsta en la clinica de la escuela. Hoy…examen y limpienza de tus dientes. Entiendes?” (난… 여기 학교 클리닉의 치과 의사야. 오늘은 이 검사랑 클리닝을 할 거야. 이해됐니?)
“Si, si!” (네!)
“No dolor, no dolor” (안 아플 거야)
물론 전화 통역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난 최대한 더듬더듬 단어들을 뱉어가며 열심히 설명한다. 내가 조금은 웃겨 보이는지, 아이는 그제서야 배시시 웃는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는다. 우리는 서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알아, 나도 그래 본 적 있어.
부모와 통화해야 하는 경우에 어떤 아이는 말한다. “엄마는 영어를 못해요, 하지만 내가 통역해 줄 수 있어요.” 규정상 아이들을 통역으로 쓸 수 없기에 전화 통역원을 써야 하지만, 너무 고맙다고, 엄마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울 거라고 말해준다. 아이는 쑥스러운 듯 웃는다. 은행에서, 병원에서, 식당에서, 길거리에서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영어로 말하던 내가 함께 웃는다.
이 곳에서 일한 햇수가 늘어갈수록, 아이들 또한 한 학년씩 올라간다. 정기검진을 하러 돌아오는 아이들은 몸이 자라는 만큼, 영어 실력도 는다. 곧 나보다도 훨씬 더 유창하게 하게 될 것이다. 이 아이들은 언어가 아닌, 내가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이유들로 꿈을 포기하는 기로에 설 것이다. 아이들에게 너무 빨리 단념하지 말라고, 그렇지만 결국 그렇게 되더라도 괜찮다고,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덮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말하는 대신 난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너의 언어를 잊지 마”라고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