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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링 Aug 02. 2022

모두들 너와 말하고 싶어 해

솔방울 같은 사람


어렸을 때 엄마는 카시트에 앉은 내게 ‘10분 동안 말하지 말기’ 게임을 제안하며 생각 좀 하고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당시엔 눈물을 삼키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다. 난 말끝마다 잊지 않고 “왜??”를 붙였고 그 대가로 「WHY?」 시리즈를 전권 획득했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다. 머리가 크면서 눈치 빠른 아이로 자랐다. 사실무근이다. 그냥 그렇게 믿고 있다.


기억나지도 않을 때부터 번역기 돌리듯 머릿속에서 말을 돌리고 뱉었다. 이 순간 이 상황에 저 사람에게 이 말을 해도 될까? 이 과정은 순식간에 일어났지만 빛의 속도로 뱉어지는 말이 과반수 이상이었다. 입은 뇌보다 빨랐다. 몸이 들뜨며 입이 달싹거리고 결국 목소리가 울린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난 언제나 침묵을 동경해 온 편이다. 말을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은 사람 없는 풍경화 같았다. 이왕이면 인상주의 화가들의 나무나 호수만치 멋들어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난 선이 진한 초상화 연작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너무 많았다.


말로 먹고사나 구설수에 오르기에 십상인 사주였다. 그래서일까. 좋은 대화는 늘상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희귀한 편에 가까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책하는 일이 잦았다. 상대방의 말은 돌아서면 까마득했고, 눈치를 보면 볼수록 어긋나는 것 같았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는 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사주 탓을 하기엔 문제가 너무 명백했다. 나는 종종 상대방보다는 그의 눈에 비춘 나를 봤기 때문이다. 자기 얼굴을 보다가 아사한 나르키소스와 다를 바 없었다. 숱한 자기계발서는 잘 듣는 법보다 잘 말하는 법에 더 초점이 맞추어 있었고, 잘 듣기 위해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잡혔다. 그때 피터를 만났다. 스무 살 무렵이다.


피터는 솔방울 같은 사람이다. 빤히 보면 어색하게 웃으며 퉁명스럽게 “왜.뭐.” 했다.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표정에서 전부 드러났다. 솔방울은 습도에 따라 비늘을 펼치거나 접는다. 습도가 낮으면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을 하고, 높으면 움츠러든다. 피터는 착하다기보단 진솔했고, 그닥 겸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 것만큼 유쾌했다. 피터는 달변가라기보다는 소통의 달인이었다. 모두들 그와 말하고 싶어 했다.


어느 날 피터에게 ‘indifferent’의 뜻이 잘 외워지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는 내게 왜 그런 것 같으냐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나는 아마 ‘different(다르다)’라는 단어와 ‘indifferent(무관심하다)’의 뜻이 안 어울려서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 그 후로는 뜻을 까먹지 않는다. 난 피터가 본의아니게 이걸 의도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우리의 대화를 한 단계 격상했다. 기분이 안 좋다고 하면 어김없이 이유를 물었고, 남의 감정을 함부로 단정 짓는 법이 없었다.


난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대화는 서서히 망해갔다. 상대방이 하는 말보다는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 탓이다. 그러니 이른 나이에 피터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호불호가 확실했고, 말을 얼버무리지 않았으며, 눈은 반짝거렸다. 대화하다 보면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되려 인상을 남기려는 마음이 없을 때 산뜻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로버트 그린은 저서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공감적 태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내가 정말로 남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세는 오히려 내가 아주 무지하며, 타고난 나의 편향 때문에 사람을 부정확하게 판단할 거라고 가정하는 태도이다. 피터는 내게  태도를 몸소 보여준  번째 어른이다. 상대가 말할   말을 곱씹던 나와 달리, 피터는 말을 귀담아듣고 이해가  가는 부분은 반드시 되물었다. 나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줬다. 그건 타인에 대한 온전한 관심이기도 했다.


피터를 만난 뒤로는 의식적으로 말을 눌러 삼키고 온 힘을 다해 시선을 돌렸다. 상대방이 말하고 있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솟아오르는 두더지를 때려잡았다. 두더지는 잘 죽지 않는다. 대신 구멍이 많아졌고 조금씩 사람들이 보였다. 들리기 시작했다. 검푸른 공간은 역시나 비어있지 않았다. 적절한 침묵과 호기심이 뒤섞인 대화는 때로 예술적이었다.


침묵을 지킨다는 건 당신의 말을 듣겠다는 태도이며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일종의 다짐이다. 혹은 당신의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 침묵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나 자리를 만들어준다는 건 변함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건 정말 말이었을까. 단지 마음껏 있을 곳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2022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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