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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산 Dec 20. 2021

유쾌한 짜증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20세기 어느날, 움베르토 에코와 여행을 떠나 봅시다.


일단 비행기를 타야죠. 국제 항공편에는 기내식이 나와요. 그런데 좌석은 너무 협소하고 탁자 역시 비좁은 데다가 음식을 받을 땐 비행기가 흔들리게 마련이에요. 냅킨은 너무 작아서 옷깃에 찔러 넣으면 배를 가릴 수 없고 배 쪽에 올려 놓으면 가슴께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 와중에 기내식 메뉴엔 꼭 완두콩이 있죠.


완두콩은 포크를 피해 다녀요.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데, 기내에서 완두콩을 먹을라치면 비행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난기류를 만나고 기장은 안전 벨트를 매라고 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완두콩은 대단히 복잡한 인체 공학적 계산에 따라 다음과 같은 양자 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옷깃 속으로 들어가거나 바지 지퍼의 오목한 곳으로 떨어지거나.

 

기내식에 딸려 나오는 빵은 또 어떻습니까. 잡기가 무섭게 가루로 부서지는 덩어리들이어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게 마련이죠.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설 때 쯤이면 빵가루가 엉덩이 밑에 모여 있다가 바지에 달라붙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 기내식의 공포를 이기고 호텔에 도착합니다. 장시간 비행을 했으니 샤워부터 해야죠. 웬만한 호텔이라면 투수객을 위해 욕실 세면대 위에 샴푸, 바디 크림, 용도를 도통 모르겠는 몇 가지 크림들, 비누 등을 비치해 놓습니다. 그런데 호텔 이름이 커다란 글씨로 씌여 있는데 반해, 내용물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글씨로 옆쪽에 표시해 놨어요. 그것들을 잡을 때는 이미 알몸으로 안경도 벗고 있죠.


또 호텔은 나이 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죠. 작은 글씨를 지독히 싫어하는 이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가 지금 잡고 있는 것이 샴푸인지 바디 크림인지 구두약인지 가려내기가 불가능합니다. 그것들을 디자인한 사람들도 호텔에 투숙했다가 구두약을 자기 몸에 문질러 보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 여기엔 변명의 여지가 없죠. 왜 방치하는 걸까요?


비누 대신 바른 구두약을 닦아냅니다. 몇 분 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후 배를 채우기 위해 룸서비스를 부르죠. 커피의 종류는 많고 맛도 가지가지예요. 그런데 아메리칸 커피 중에는 우리가 특별히 구정물 커피라고 지칭하는 물건이 있습니다. 대개 썩은 보리와 시체의 뼈, 매독 환자를 위한 병원의 쓰레기장에서 찾아낸 커피콩 몇 알을 섞어  만든 듯한 이 커피는 개숫물에 담갔다가 꺼낸 발 냄새 같은 특유의 향으로 금방 식별할 수 있습니다. 보통 호텔에서 마실 수 있죠.


커피를 던져 버리고 호텔 밖으로 나섭니다. 택시를 잡아야죠. 우리는 택시에 오르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의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바로 택시 기사님을 상대하는 일입니다. 기사님들은 온종일 다른 운전자들과 싸움을 벌이면서 차들이 붐비는 도로를 헤쳐 나가는 일을 업으로 삼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사람의 형상을 한 피조물은 무조건 혐오하게 마련입니다. 기사님들을 보수적이라고 욕하진 마세요. 정치와 상관없이 강력한 정부를 원하는 분들이죠. 자가 운전자들을 모두 총살 시키고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택시 외에는 통행 금지를 시킬 정부를 말입니다.

 

택시 기사님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기사님 특유의 인간 혐오증을 드러내는 분과, 자신이 겪은 일을 시시콜콜히 이야기하는 분 말입니다. 문제는 두번째 부류죠. 기사님들이 늘어놓는 이야기는 는 대부분 새겨들을 만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것이어서, 선술집에서 그런 얘기를 늘어놓는다면 주인장이 집에 잠이나 자는 게 좋겠다며 쫓아낼 법 합니다. 하지만 기사님은 자기 얘기를 매우 놀라운 것으로 여겨요. 그래서 우리는 뒷좌석에서 원 세상에나! 말도 안 돼요! 정말 별 일이 다 있군요! 하고 장단을 맞춰주는 것입니다. 그려면 우리 기분이 좀 나아지니까요.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의 한 장면입니다. 에코가 세상에 화풀이 하는 방법은 바로  '패러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갑자기 이 유쾌한 기호학자가 그리워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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