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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Nov 14. 2022

발칙하지만 빈곤한 상상력의 결과물

<램>, 발디마 요한손 (2021) 리뷰

 (2021)

연출: 발디마르 요한손

출연: 누미 라파스, 힐미르 스나에르 구오나손, 비외르든 흘리뉘르 하랄손 

별점: 2.5/5

지울  없는 상실감과 슬픔에 사로잡혀 슬픈 마리아와 그녀의 과묵한 남편 잉그바르는 바람이 많이 부는 산악 아이슬란드의 외딴 지역에 있는  농장에서 힘든 일과 힘든 일정으로 위안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둘의 관계가 끈끈해져갈 무렵, 설명할  없는 일이 벌어지고, 그렇게  사람의 암울한 가정에 다시 한번 행복이 찾아온다. 이제 고통스러운 결말은 새로운 시작을 낳고, 잉그바르의 의문스러운  피에튀르가 농가에 도착하여 마리아와 잉그바르의 새로 찾은 아름다운 행복을 위협한다. 그러나  자연의 선물은 결국 희생을 요구한다. 뭔가에 홀린듯한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사랑의 이름으로 어디까지 가게  것인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메타포와 상징에만 기댄  안일하게 채워 넣은 서사에서 매력을 찾기란 힘들다. 더군다나 영화가 논하고자 하는 비판들이 설득력이 떨어짐에도 감독 본인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이상 영화  장점을 찾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발디마르 요한손의 <> 분명 발칙한 작품이다. 영화는 중반부 마리아에 의해 살해당하는 어미 양에게 이름 지어진 번호 3115처럼 예레미야 31 15절을 비틀어 신과 인간의 관계성, 상실에 대한 책임과 같은 주제의식을 던지고자 한다. " 야훼가 말한다. 라마에서 통곡 소리가 들린다.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구나.  눈앞에 아이들이 없어 위로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가지 않는구나." (예레미야 31:15, 공동번역) 그러나 <> 그러한 그리스도교적 맥락의 상징에 기대어 정작 중요한 내러티브의 디테일을 등한시했으며, 그렇게 구축해낸 상징으로 던지는 주제의식조차도 정통 그리스도교적 맥락에서 보자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과 아이슬란드의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영상미가 영화적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여줄 뿐이다.

<> 논하고자 하는, 정확히는 비판하고자 하는 주된 주제의식은 '자식의 상실'이라는 맥락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교의 폭력성이다. 앞서 언급한 예레미야 31 15절에서부터 자식을 잃은 라헬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실은 영화 속에서  갈래로 드러난다.  번째로 인간의 몸을 가진  '아다' 마리아 부부에게 잃은 '3115' 어미 양의 상실이 있다. 어미 양은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위해 아다를 멀리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하고 축사를 나와 종일 아다가 있는 방의 창문을 향해 울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어미 양을 마리아는 그토록 잔혹하게 살해해버린다. 이는 바로 이어질  번째 상실과 대비하면 매우 섬뜩한 대목이다.

 번째 상실의 양상은 양들과 대비되는 '인간' 잉그바르와 마리아 부부의 몫이다. 영화 후반부 들어 마리아는 아다를 데리고 근처의 묘지로 향하는데 그곳에는 아마도 그들의 일찍 죽은 자식으로 보이는 '아다'라는 이름의 아이의 묏자리가 놓여 있다.  지점에서 초반부 마리아 부부가 침울해했던 과거의 불행이 '자식의 상실'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지난 문단에서 썼던 것처럼, 자식이었던 아다를 잃고 새롭게 선물처럼 자신들에게 돌아왔다고 믿는 인간의 몸을  어린양 '아다' 자식으로 키우는 부부의 모습은 어딘가 섬뜩하다. 마리아는 자신이 그토록 슬픈 자식의 상실을 겪고도 어미 양으로부터 아다를 강탈해 같은 상실을 겪게  것은 물론이고 그를 무참히 살해하기까지  것이다.

이런 대비, 그러니까 인간과 짐승이라는 종족적 대비에서 <> 주제의식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교적 맥락에서, 아무래도 요한손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과 양의 관계로 상정한 우화를 직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바라본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은 인간을 착취하고 그들로부터 얻은 것을 자신의 것인  강탈하는 존재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탈취물이자 신이 자신들의 자식으로 삼으려  존재인 '아다'  우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핵심적 소재가 된다. 말하자면, 아다는  우화 속에서 '예수' 같은 존재다. 이는 어찌 보면 지극히 뻔한 상징이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일컬어 '하느님의 어린 '이라 칭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우화를 직조하는 과정에서 요한손은 이야기를 만들면서도 자신조차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메타포의 오류에 빠진다. 사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오해에는 신자는 물론이고 성직자, 신학자들조차 자주 빠지는 탓이다. 신적 존재와 예수를 불가분의 일체가 아닌 별개의 존재로 상정한 것에서부터 요한손이 던지고자 한 비판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를 향한 것이 아니게 된다. 더구나 아다가 물적으로 양과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한 반인반수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를 반신반인으로 보았던 이단적 사고방식에 더욱 가깝다. 바로 이 지점에서, <램>의 주제의식은 이미 한 차례 설득력을 잃고 만다.

요한손의 비판이 허수아비 때리기가 되는 대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부부의 산탄총을 뺏어 들고 등장한  다른 반인반수는 잉그바르를 마리아가 어미 양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살해해버리고 아다를 자신들의 세계로, 그러니까 짐승들의 세계로 데리고 간다. 이는 흡사 자신들을 착취하던 신적 존재에 대항하여 강탈되었던 자신들의 영도자를 도로 데려가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그러나  역시 정통 그리스도교적 교리에 대한 비판이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구약의 야훼와 신약의 그리스도가 서로 다른 존재이며 전자를 배척하고 후자를 취해야 한다는 논리로  여지가 충분한 탓이다. 이런 논리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2세기의 철학자 마르키온이었으며, 그는 공의회에서 이단 판정을 받아 정통파에서 추방되었다.

이상의 맥락에서 필자는 이 영화의 논지에 동의할 수 없고, 영화의 서사가 매력적이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 영화에도 탁월한 장면은 몇 군데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부부와 피에튀르 세 사람이 핸드볼을 하며 노는 동안 밖으로 나갔던 아다가 반인반수에게 살해당하는 가족의 강아지를 보는 장면이다. 실제로 영화에는 인간과 양 외에도 강아지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축사에 갇힌 양들과는 달리 자유롭게 밖을 나다니며 인간의 문명을 누리는, 인간에 기생해서 사는 동물들로 그려진다. 반인반수가 어미 양을 죽인 인간들에게 복수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기생하던 동물을 먼저 죽인다는 것은 나름대로 유효한 상징으로 기능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정리하자면, <> 디테일의 부재로 인해 매력 있는 서사를 만들어내지도 서사를 통해 던지고자  주제의식이 납득이 가지도 않는 영화였다그러나 그런 주제 하에서 영화를 이끌어가는 영상미와 분위기만은 나름대로 가능성을 내비쳤다고 말할  있겠다. <유전>이나 <미드소마> 같은 맥락에서 <> 근래 A24에서 배급하는 호러를 표방하는 영화들이 지닌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영화다그러나 앞선  작품에 비해 이렇다  매력적인 부분이나 완성도는 크게 보장되지 않은 영화였다는 감상을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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