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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Nov 21. 2022

고요와 폭풍이 비일관적으로 오가는 관계의 불안

<킬링 오브 투 러버스>, 로버트 맥호이안 (2020) 리뷰

킬링 오브  러버스 (2020)

감독: 로버트 맥호이안

출연: 클레인 크로포드, 세피데 모아피 

별점: 4/5

니키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 동의하고 별거 중인 ‘데이빗 우연히 아내의 연인 ‘데릭 존재를 알게   참을  없는 분노를 느낀다. 한편, 결혼과 육아로 단절되어버린 꿈을 이루기 위해 로펌에 취직한 ‘니키 같은 건물에 근무하는 ‘데릭에게 점점 호감을 갖게 되고 ‘니키와의 관계를 보다 발전시키고픈 ‘데릭 밤마다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픈 욕망을 키워간다. 서로의 곁에 머물고 싶은  연인의 욕망은 그들을 위태로운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아닙니까."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 겨울>  대사인  문장은 4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새로운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이번에 우리가 살펴볼 영화인 <킬링 오브  러버스> 그런 새로운 것들 중에서도 특히나 관계에 대한 불안과 결혼과 가정이라는 관념에 대한 쉽게 답할  없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징후적인 영화다. 영화는 서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됨에 동의하고 아내와 별거 중인 데이빗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데이빗과 니키, 그들의 자식들, 그리고 니키의  애인인 데릭은 모든 것이 처음이고 너무나도 복잡한  새로운 관계에 적응하지 못한다. 데이빗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상황에 분노하고 니키는 해결되기는커녕 꼬이기만 하는 관계 속에서 답답함을 느낀다. 자식들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부모의 관계에 당황스러워하고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맏딸 제스는  모든 파국의 원인을 아빠에게 돌린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파국 속에 끼어든 데릭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관계 속에서 잘잘못을 따지거나 정해진 정답을 찾으려 들지 않는다영화 자체를 이끌고 가는 것은 데이빗의 불안 가득한 심리상태이지만 주요 인물들이 이토록 혼란스러운 관계를 마주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것이 누구의 문제인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중요한 것은 오히려  모든 관계들이 전통적인 가족관전통적 질서를 통해 보기에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며 데이빗에게도니키에게도심지어는 데릭과 아이들에게 있어서도 처음 겪는 일이라는 점일 테다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으며평생 그렇게 가족으로 함께 지낼 것이라 여겨왔던 데이빗과 니키에게 지금의 관계는 너무나도 어렵다그런 관계의 불안을 영화는 영상과 음향을 통해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시킨다. 1.37:1 화면비는 옆으로  트이지 않은 비율 탓에 보는 내내 시선을 답답하게 만들고스릴러나 호러 무비에나 쓰일 법한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음악은 분노와 절망이 비일관적으로 오가는 데이빗의 심리를  드러낸다자칫 영화가 루즈해질  있음에도 적재적소에 활용되어 감정이입을 돕는 롱테이크도 일품이다특히나 세로로 넓은 화면비는 황량하고 차가운 미국 중부의 분위기를 그려내는  역시 탁월하게 작용한다.

작중 제스는 데이빗을 향해 날이  목소리로 외친다.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평생 같이 살면  되는 거야?" 이는 영화가 그려내는 것과 같은 현대적이고 낯선 관계가 아닌 기존의 우리가 익숙하게 겪어왔던 전통적 질서로의 회귀를 바라는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데이빗 역시 누구보다도 그것을 원하지만 그런 회귀가 어렵다는 것은 영화  데이빗에게 일거리를 주는 늙은 여성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사랑은 감정일 뿐이야. 타올랐다가도 식어버리지. 결혼 생활은 그에 비해 존중에 가깝고."  대사와 정확히 드러내듯이, 데이빗과 니키는 별거 중이라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서로를 향해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다. 데이빗은 가족을 잃으리라는 불안감에 몰래 니키와 아이들이 사는 집에 숨어들 거나 새벽에 농담을 들려주겠다며 창밖에서 아이들을 깨우기도 하며, 니키는 제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은  무작정 친구와의 약속을  나가게 하고 데이빗과 시간을 보내게  애꿎은 데이빗에게 원망을 돌린다. 이런 지점은 데릭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는 니키와의 관계에서 데릭이  자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데이빗을 폭행하기까지 한다. ,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상호 존중 없는 관계로 인해 해쳐지는 전통적 가족과 혼인관계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킬링 오브  러버스> 배려와 존중이 사라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대가로 관계의 상실이라는 불안 속에 놓인 이들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게 된다. 항상 손에 쥐고 있는 리볼버 권총과 사륜구동 트럭을 운전하는  등에서   있듯이 전형적인 전통적 미국인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데이빗에게 있어 이런 상실은 더욱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그것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영화의 목표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영화의 말미에서 데릭에게 폭행당한 데이빗이 자신의 상황을 항변하거나 법적 조치를 취하는 대신 차를 타고 황무지로 도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니키는 그를 뒤쫓고 다시금 데이빗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장면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로 전환되어 데이빗의 가족이 생활용품 쇼핑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결말에 이른다. 아이들과 니키, 데이빗이 함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데이빗과 니키가 별거를 끝내고 다시 결혼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님을 확실히 한다. 데이빗은 스마트 기능이 내장된 세탁기가  굳이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하는  여전히 현대 사회를 발맞춰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탓이다. 그들은 삭막한 현대 사회  새로운 관계에 적응하지도,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었던 과거의 관계로 회귀하지도 못한  그렇게 어정쩡한 형태의 '가족' 속으로 다시금 도피한다. 그들의 이후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끝맺어지지만 데이빗을 향한 영화의 애티튜드는 굳이 따지자면 비관에 가까울 것이다. 구세대와 신세대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미지 가득한 공간으로 새로운 출발의 시동을 거는 것으로,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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