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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Dec 09. 2022

수수께끼 같은 세계에서 청년은 왜 분노하는가

<버닝>, 이창동 (2018)

버닝 (2018)

감독: 이창동

출연: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  

별점: 4/5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는 배달을 갔다가 어릴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를 만나고, 그녀에게서 아프리카 여행을  동안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한다. 어느  벤은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대해 고백한다. 그때부터 종수는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버닝> 분노에 관한 영화이자 동시에 청년에 관한 영화다. 이창동이 그려내고자  2018년의 한국 사회에서 청년이란 존재는 '정의되지 못함'이라는 고충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로 모두가 청년 문제를 논하고 청년 담론 따위의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누구도 청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논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한 존재론적 고충을 품고 있는 그들은 필연적으로 분노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들의 분노는 근원적으로는 해결되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들을 정의하지 못하며, 동시에 정의하려고 들지도 않는 기존의 세계가 굳건히 존재하는  결코 해소될  없는 분노인 탓이다. 영화는 중심 인물이 되는  청년인 종수, 해미, 벤이 분노를 해결하려 드는 방식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분노의 원인을 질문한다.

 명의 중심인물  우선 벤을 먼저 살펴보자. 벤은 청년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존재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심지어 일을 하기는 하는지조차 불분명하지만 한없이 부유하며, 포르쉐를 타고 비싼 술과 차를 마시며 집에서는 파스타를 해먹는  대부분의 청년이 꿈꾸는 경제적 이상향에 다가가있다. 그러나 '청년'이라는 존재는 경제적, 계급적으로만 정의되는 이들은 아니다.  역시도 201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명의 청년으로서 '정의되지 못함' 대한 분노를 겪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분노를 해소하는 방식에 있다. 작중 벤이 분노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갖추었음에도 정의되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이   없는 권태감이라는 형태로 자신에게 표출되는 탓이다. 그런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벤은 중립적인 초월자 행세를 한다. 가슴부터 올라오는 베이스를 느끼며 자신을 태워달라는 듯이  자리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할  벤은 세계와 거리를 두는 관조자인  행동한다. 그러나 실상 폭력적, 반사회적 범죄일 뿐인 그의 행동은 벤이 청년으로서 겪는 분노를 간편하게 해소하고자 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해미이다. 햇빛조차 구걸해야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그의 삶은 오늘날 한국 청년이 겪는 갑갑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카드빚이 가득하며 마트 판촉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겨우 삶을 전전하는 그는 분명 계급적 최하단에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끝없이 자신의 의미를,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하며 홀연히 여행을 떠나는  특이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런 해미가 분노를 해소하는 방식은 다름아닌 '망각'이다.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없다는 것을 잊어버림' 관한 메타포가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자신을 대변하는 청년이라는 정체성이 실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그것을 잊어버리기로 작정한다. 가장 삶의 의미를 상기하고자 하는 인물인 해미가  수단으로 망각을 택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끝없이 의미를 갈구하는 '그레이트 헝거' 되고 싶어하던 해미는 끝내 자신을 정의함에 실패하고, 망각이라는 선택을 통해 존재의 세계로 사라진다. 작중 해미의 증발과도 같은 실종은, 때문에 매우 상징적인 내러티브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종수. 그는 현실에 대해 쓰고 싶어하지만 자신조차 정의내릴  없는 현실 앞에서   마디도 적을  없는 작가 지망생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벤과 해미를 동시에 닮아 있다. 실제로 그는 벤처럼 권태감에 빠져 있으며, 해미처럼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들  사람과 종수는 근원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벤이 권태함으로 인해 분노하는 것과 달리 종수는 분노함으로 인해 권태로워졌고, 없음을 망각하고 있음의 세계로 사라지려는 해미와 다르게 종수는 자신의 공허를 끝없이 직시하려 하며,  공허의 의미를 되묻는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잃어버린 종수가 해미를 찾아 헤매고, 벤이라는 자신과 다른 분노를 겪는 존재를 살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버닝> 이들이 분노하는 원인을 정확히 따지려고 드는 영화가 아니며, 오히려  이유를 질문하고자 하는 영화에 가깝다. 실제로 영화는 시종일관 무언가에 대한 답을 내리기보다는 새로운 질문을 추가하는 데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고양이 보일이는 실재하는가, 해미는 어디로 갔는가, 종수가 해미를 우물에서 구해준 이야기는 사실인가, 벤은 해미를 살해한 것인가 등등 말이다. 이들 모두의 분노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없으나 이들 청년들의 분노가 기성세대의 분노와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정도는 작중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있다. 종수, 해미, 벤의  세대인 부모들이 영화에 언급되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종수의 아버지부터 살펴보자. 그는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해  부조리의 장본인을 폭행하고 감옥에  인물이다. 그는 사회의 폭력성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방식의 분노를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의 세대와는 달리 보다 파편화되고 폭력이 일상화, 내재화 되어버린 2010년대 말의 사회에서, 청년에게 그런 부조리는  이상 존재를 체감하기조차 힘든 것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종수로 대변되는 청년은 아버지와 같은 폭력성을 내포하기에도 무기력해진다.

다음으로 해미의 어머니. 그는 해미가  카드  때문에 해미와  의절하다시피  상태로 그려진다. 그는 일상적 가족관계가 경제적 문제 앞에서 붕괴해버린 IMF 세대의 분노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들은 이미 붕괴해버린 토대 위에서 새로운 기틀을 쌓아야 하는 절망 위의 절망을 겪고 있는 세대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경제적 공황에 정신적으로 함락당한 청년, 특히나 해미가 끝없이 삶과 존재의 의미를 갈구하는 것은 매우 징후적이다.

마지막으로 벤의 부모를 보자. 그들은 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문화적으로 여유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주일에 들르는 성당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일정 부분 전통적이고 경건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런 지점은 삶에 권태를 느끼고 오직 재미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벤의 캐릭터성과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실제로 벤은 그들과 상당 부분 거리를 두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말이다. 이는 부유층 사이에서도 갈라지는 기성 세대와 청년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해미의 실종 이후 급격히 텐션이 올라 숨가쁘게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종수는 그를 찾아 헤매는 동시에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웠는가에 대한 질문에 시달린다. 비닐하우스 방화가 취미라는 벤의 분노 해소 방식에 종수는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일정 부분 그것을 혐오한다. 그러나 스스로 꾸는 꿈 등에서 드러나듯이 자꾸만 그런 방식의 간편한 분노 해소에 마음이 이끌려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그는 더더욱 (자신처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해미를 찾고 그에게 의지하려 한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해미는 이미 "자신이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세계"로 건너간 상태이기에 결코 발견될 수 없다. 이제 그가 있는 곳은 청년이 처한 정체성의 부재의 세계가 아닌 '존재의 세계'인 탓이다. 종수는 그러한 실종을 벤이 해미를 살해한 것으로 판단하고, 아버지가 사용하던 바로 그 칼로 벤을 살해한다.

 과정에서 모든 것은 확실하지 않고 모호해져 버린다. 바로 그것이 <버닝> 바라보는 2010년대의 특이점이다. 종수가 벤을 살해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것과 같은 폭력적 분노 해소,  계급성의 존재론적 대물림이라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동시에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예컨대 해미와 같은) 살해함으로써 존재의 진정한 의미로부터 회피하려는 , 권태감에 빠진 벤과 같은 이를 향한 응징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모든 것의 이유에 대해 답변하려 들지 않으며, 어느  하나도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청년이라는 존재와 그들의 행위성 자체가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나온 질문들, 해미의 행방, 벤은 살인범인지, 고양이와 우물의 실재 여부 등은 결국 모호한 채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저 그런 모호성 속에서 어떻게든 작금의 세계와 청년을 이해하려고 하는  남자만이, 노트북 앞에 앉아 끝없는 존재론적 질문을 반복하는 것으로 그렇게 영화는 마무리된다. 세계가 늘상 그랬듯이, 기억하는 자만이 끝까지 증언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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