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년의 영화 Dec 13. 2022

소돔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 (2003)

도그빌 (2003)

감독: 라스  트리에

출연: 니콜 키드먼,  베타니 

별점: 4.5/5

록키 산맥에 자리한 작은 마을 '도그빌'.  평온한 곳에 어느   총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미모의 여자가 마을로 숨어 들어온다. 창백한 얼굴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드리우고 있는  비밀스러운 여자의 이름은 '그레이스'. 그녀를 처음 발견한 '' 다만 그녀가 갱들에게 쫓기는 신세라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첫눈에 그레이스에게 반한 그는 그레이스를 마을 사람들에게 인도한다.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등장에 경계심을 거두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 하지만 톰의 설득으로 그레이스에겐 마을에서 머물  있는 2주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2주의 시간이 지난 , 도그빌 사람들은 천사 같은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고단한 방랑에 지친 그레이스에게 도그빌은 그렇게 행복한 마을이 되어가고, 그레이스는 자신을 보살펴주는 톰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마을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곳곳마다 그레이스를 찾는 현상 포스터가 나붙는다. 소박하고 착해 보이기만 하던 도그빌 사람들은 점점 그녀를 의심하면서 변하기 시작하고, 숨겨준다는 대가로 그레이스를 견딜  없는 노동과 성적 학대 속으로 몰아넣는다.


소격효과라는 연출기법이 있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가 고안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에 반박하는 것으로, 모종의 장치를 통해 관객이 극에 몰입하지 않고 오히려 극을 중립적인 시선에서 비판적으로 보게 하는 일련의 전략이다. 이번에 살펴볼 영화 <도그빌> 경우 배경이 되는 마을 도그빌의 세트장이 이런 역할을 한다. 도그빌에서 공간과 공간은 바닥의  선으로만 구분되고, 창문을 제외하면 벽이나 문도 따로 달려있지 않으며, 어떤 등장인물이 말이나 행동을  때는 옆이나 뒤의 다른 등장인물의 행동이  드러나 보인다. 이런 세트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해왔던 마을의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낯설게 보인다. 라스  트리에는 이런 소격효과를 적극 활용하여 자신이 드러내고자  주제의식을 관객들이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런 세트의 설정을 통해서 그가 전하려 했던 주제의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으로 대변되는 21세기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조롱이라고   있겠다.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유럽  대부분의 서구권 국가들이 그리스도교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현실 앞에서  트리에는 지극히 그리스도교적 시선으로 그런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내뱉는다. 이보다  신랄한 비판이 있을까.

실제로 영화는 곳곳에 그리스도교적 상징을 담고 있다. 마을의 상징인 (도그) 이름이 구약의 선지자인 '모세' 점에서부터 그레이스가 매고 있는 쇠사슬이라는 상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되는 듯하다. 언제나 자비를 베풀고 마을 사람들을 용서하려 드는 그레이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있고, 그와 대비되는 분노의 심판자를 자처하는 마피아 아버지는 구약의  야훼를 닮아 있다. ,  이야기는 어찌 보면 21세기식으로 재해석한 예수의 수난 우화로도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결말부로 넘어가면서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윤리를 완전히 비틀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결말을 내버린다. '그럼에도 용서'하리라 예상했던 그레이스가 그리스도의 대속과 같은 자기희생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마을은 멸망해도 싸다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도그빌에 심판의 불을 내릴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결말부에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트리에는 그리스도교적 우화를 만들려던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에서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고를 보내는 영화를 만들려던 거구나 하고 말이다.

이는 미국으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의 사람들에게 돌아올 것은 구원의 빛이 아닌 심판의 불꽃일 뿐이라는 선언이자, 일종의 저주에 가깝다.  영화의 주요 관객이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적 관념이 지배하는 영미권과 유럽의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히 파격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심판받아야 하는 것일까?  트리에는 작품이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도그빌 사람들이 보이는 행보를 통해 그러한 심판의 이유를 제시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도그빌 사람들의 태도가 구약적 율법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개념에도 반한다는  있다. 우선 그들이 그레이스를 대한 모습을 보자. '이빨을 드러낸 도그빌'에서   있듯이, 처음에는 그레이스를 그래도 성실한 객식구 정도로 여기며 환대하던 도그빌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를 착취하고 노예처럼 부려먹기 시작한다.  계기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레이스의 현상 수배 전단을  이후부터이다. '위험 부담이 있으니 이제부터 적게 받고 많이 일하'라는 논리는 인간을 화폐와 교환가치로만 이해하고 수단으로써 대하는 것이다. 혹자는 그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가 굴러가는 것이 아니냐 논할지도 모르지만,  트리에는 21세기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질서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던 듯하다. 실제로 교환가치, 화폐를 인간보다 우위에 두고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사회학적 개념으로는 '물신주의' 부르고, 그리스도교적 개념으로는 '우상숭배' 한다. 결국 도그빌 사람들은 현상 수배된 그레이스를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우상숭배 금지라는 가장  계명을 어긴 자들이  것이다.

이외에도 도그빌 사람들이 어긴 구약의 율법은 많다. 대표적인  매일 밤마다 그레이스를 찾아와 강간하던 남자들이 어긴 '간음하지 말라' 율법일 테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약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럼에도 모두를 용서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달리 그레이스가 이들의 구원을 포기하게 만든 계기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그레이스의 쇠사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응하는 부분이 많다. 예수가 수난 과정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듯이 그레이스도 몸에 쇠사슬을  채로 마을을 걸어 다니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결과로써 이뤄지는 상황이 예수와 그레이스의 차이를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본인이 직접 걸려 대속물로서 모두를 용서하고 승천했으나 1세기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과 달리, 도그빌 사람   누구도 그레이스의 희생이나 죽음을 통한 대속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레이스는 이미 자신들의 일을 대신해주는 최고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 속에서 도그빌 사람들은 노예주이자 동시에 노예이다. 사실 쇠사슬에 묶인 것은 그레이스뿐만이 아니라 그를 착취하는 도그빌 주민 모두인 것이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자기 이익에 따라 쇠사슬을  사회에서 대속의 가능성은 상실된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이기에나 가능한 구원 가능성의 상실인 셈이다. 또한 주민들이 그레이스를 겉으로는 더러운 여자 취급하면서 속으로는 누구보다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예수의 수난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도 유사하다고   있겠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야훼의 율법은 지키지도 못했으며, 예수는 아예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장난감 취급한 '용서받지 못할 자'들이 되었다. 이러한 근거로 도그빌은 21세기의 소돔이 되어 불타 없어진다. 그러나 영화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가 '악함' 그 자체로 인해 멸망한 것은 아님을 확실히 한다. 그것은 오히려 악에 굴복하는 인간의 나약함에 의한 것인 탓이다. 폰 트리에의 관점에서 절대선과 절대악은 존재치 않으며 인간은 언제나 그럴 기회가 생기면 악해지는 존재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가 언제나 우리를 악으로 내몰고 있는 악한 사회라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가지는 것이 그레이스를 사랑하는 톰이라는 캐릭터이다. 지식인 내지는 성직자를 상징하는 그는 시종일관 그가 믿는 신념과 윤리대로 마을 사람들을 계몽하려 든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고 그레이스는 그로 인해   파국에 빠진다. 이런 그의 모습은 일정 부분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하다. 이는 오늘날의 종교인들이 늘상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것을 외치지만 그것이 오히려 세속화된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일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심판의 결과 살아남은 유일한 대상이 강아지 '모세'라는  또한 매우 징후적이다. 모세라는 이름은 차치하고, 도그빌에 벌어진 심판의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뿐만 아니라 요한의 묵시록에 언급된 아마겟돈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신은 분노할만한 자들만을 심판하지 않으리라는 묵시록적 맥락처럼, 누구도 해하거나 대상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밥을 빼앗겨 분노할 자격이 있었던 강아지 모세만이 유일하게 심판을 피할  있었던 것이다.  유일한 생존자가 결국 인간도 아닌   마리뿐이었다는 점은 참으로 씁쓸한 대목이 아닐  없다. 또한 결말에서 여태껏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목소리로만 표현되던 개의 형상이 비로소 실제로 드러나며 다시금 소격효과를 노린 연출은 그야말로 탁월하다고 말할  있겠다. <도그빌>  실험적 연출 방식만큼이나 끝없이 우리에게 깨어있음을 요구하는 영화다. 오늘날 갑자기 예수가 인간으로 재림한다면 우리는 그를 이전과 똑같이 박해할 것이며,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논리와 결부되어 보다  박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트리에는 최소한의 것들만을 담은 연출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결과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찬란한 구원이 아닌 참혹한 심판뿐이라는 것까지도. 이러한 그의 경고 어린 시선은 어떤 부분에서는 무시무시할 정도다.

작가의 이전글 수수께끼 같은 세계에서 청년은 왜 분노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