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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달고나 Nov 18. 2022

빨강은 같은 빨강이 아니야

편집자 이야기

간혹 책이 나올 때면 인쇄소로 '감리'라는 것을 간다.

주로 인쇄물이 우리 '생각'한 바로 그 색이 맞는지, 균일하게 얼룩 없이 찍혔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처음 나온 인쇄지를 펼쳐놓고, "좀더 Y(황)을 좀 올려 주시고 M(적)을 좀 내려 주세요."라고 기장님(인쇄'기'의 '장'이기 때문에 기장님이라고 부른다)에게 부탁하면 세밀하게 색을 조절해준다.

사실 온갖 것이 다 디지털화돼 있기 때문에 색도 마찬가지로 숫자화가 돼 있다.

인쇄에서는 네 가지 숫자의 조합으로 (거의) 모든 색을 다 표현한다. C20Y10M50K0이라고 하면 어딜 가나 같은 색이 나와야 한다.

C20Y10M50K0

 모니터는 RGB방식이라 색이 다르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같은 인쇄기로 같은 데이터 값을 넣고 찍어도 다른 색의 인쇄물이 나온다. 잉크 제품번호가 다르다든지, 종이 제작 회사가 다르다든지, 인쇄소마다 조명이 다르다든지, 수만 가지의 변수들 때문에 숫자화 돼 있던 색은 다시 아날로그의 세상으로 나온다.

그래서 감리를 가면 숫자로 말할 수 없는 선문답들이 오간다.


"이런 빨강 말로 조금더 쨍한 빨강으로 해주세요."

"좀 맑은 빨강이었으면 좋겠는데요."

"이 빨강은 왜 노랗게 보이죠?"

"1번 빨강, 2번 빨강, 3번 빨강 중에 어떤 빨강이 생각하시는 빨강이에요?"


편집자, 디자이너, 기장님. 여기에 간혹 인쇄소 사장님, 영업담당자까지 붙어서 '최선'의 빨강을 찾아서 인쇄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최선의 빨강을 찾았지만, 그 빨강을 다시는 특정할 수 없다.

몇 가지 빨강을 나에게 가져다 주고, 이 날 사용한 빨강을 찾으라 하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미묘한 차이이고 수치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고유의 시간에,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고유의 빨강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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