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성운 Jul 18. 2022

[어스 (Us)] 소외된 이들의 긴 그림자

그들이 내게 부르짖는다 해도 내가 그들에게 경청하지 아니하리라



 

귀신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비주얼은 무서워하고, 웬만한 스릴러는  보는 내가 세상 제일 쫄아서  영화는 귀신이 머리삐걱이면서 나오는 공포가 아니라 <Us> 스릴러 영화다. 나와 똑같이 생긴 인간들이 나를 죽이고  자리를 차지하려 들다니, 설정부터가 말도 못하게 무섭다.





 나는 이 영화를 정치 사회적 메세지가 강렬한 영화라고 이해했다. 시작 초반부터 강렬한 메세지를 드러내는데, 주인공은 행복하고 평범해보이는 중산층 (미국기준 중산층) 흑인 가족이다. 그들의 이웃은 백인이고,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도 백인이다. 그들은 백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성공한 흑인이라는걸 초반부터 명확히 강조하고, 그들이 신경쓰는건 백인들과 금전적 성공을 비교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부잣집 중산층 가정을 습격한 그림자들은 “너희 도대체 누구야.” 라는 질문에 단순하게 “우리는 미국인이야.” 라고 대답함.


 그들은 자신들이 그림자로 살아가며 빼앗긴 것을 열거하는데, 네가 행복할 때 우린 슬펐고 네가 따뜻한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차가운 고기를 먹었고 네가 선물을 받고 의료 혜택을 받을 때 우리는 그 무엇하나 제대로 받지 못 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림자는 곧 제대로 된 삶을 누리지 못하는 미국의 소외계층, 빈민계층, 즉 계급 간의 격차가 낳은 비극적 그림자처럼 보인다.


 그림자들이 습격했을  아빠는 “ 원해? 지갑? ? 원하면 현금이라도 줄게.” 라고 말하는데,  대사야말로 상류층의 오만을  번에 드러내는 장치다. 빈민층이 분노하고 일어섰을 , 중산층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오로지 그들의 재산이라고만 생각하고, 원한다면 까짓  따위는 얼마든지 준다고 말한다. 그런 태도들은 평범하게 오만한 중상류층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그들이  분노했는가,  이렇게까지 격렬한 방식으로 일어설 수밖에 없었나를 보는 대신 돈 줄테니 꺼져, 이게 너네가 원하는거잖아, 라는 식의 거만한 태도.

사실 거만하다고 말하지만 때때로 내 안에도 조금은 도사리고 있었던 마음이고, 고생한 적 없이 자라 온 거만한 중산층들 가슴에 숨어 있는 태도기도 하다. 차별받은 이들이 들고 일어섰을 때, 그들을 탄압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 모습. 그냥 돈이면 되는 거 아냐? 돈만 바라는 거지? 우리는, 정말 그렇게 말했었다. 장애인 시위를 보고, 참고 참아 온 세상에 소외된 약자들의 항의를 보고서.


하지만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건 동정으로 던져주는 몇 푼의 돈이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건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권리, 의료, 교육혜택, 하늘을 보고 뛰어놀 수 있는 자유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그걸 보려고 들도 않는다. 보고싶지 않으니까. 그들도 정확히 우리(us)와 같은데도.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달리기 능력을 가졌고, 똑같이 강한데도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려는 대신 공격하고 죽임으로써 우리의 지위와 재산을 확고히 하려고 할 뿐이다.




 처음엔 그림자를 두려워하던 주인공 가족들도 점점 살인에 익숙해지고, 나중엔 게임처럼 그림자를  명을 죽였는지에 대해 쉽게 얘기하고, 언론에선 폭동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도 그들이 우리와 같은 얼굴임을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빈민계층을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세계를 이분화하며 우리와 온전히 다른 것으로 취급하는 행동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개개인의 사정을 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은 이유가 있고 게을러서 가난한거란 매도, 주변에서 흔히 들어온 말이다. 그들이 우리와 온전히 같은 존재임을 모르고 내 일상을 위협하는 “죽어 마땅한” 존재로만 취급한다.





 때문에 영화는 빈민계층도 중산계급과 똑같은 사람이라는걸 가장 강력하게 보여 주기 위해 지금의 엄마가 어린 시절에 그림자 엄마와 뒤바뀌었다는 반전을 드러내는데,  장면이 영화의 핵심이다. 다른 운명을 타고난게 아니라, 그저 다른 상황에 처해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애초에 태어나길 일그러지거나 여유로운게 아니라 환경이 모든걸 꾸었다는걸. 결코 내가 혼자 잘나서 중산층인게 아니고, 못나서 빈민계층인 것이 아닌데 그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아온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충격의 연속인 영화에서 마지막에 뒤돌아서 손에 손잡고 늘어선 그림자들을 보여 주는 장면이 가장 압권이었는데, 그들은 등을 돌리고 서 있고 결코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얼굴은 우리가 보지 못한, 혹은 결코 보려고 하지 않았던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의 얼굴이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손을 잡고 늘어서서 세계를 두 개로 나누겠다는  늘어선 사람들은 빈민 계층과 상위 계층의 세계를 뜻하는 장벽처럼 보인다.  영화가 개봉할 당시 트럼프 때문에 멕시코 장벽 문제와 빈부 격차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는데, 그를 의식한 장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예레미야 11:11절.


 그들이 내게 부르짖는다 해도 내가 그들에게 경청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소외된 이들의 부르짖음을 경청한 적이 있었는가. 내가 빛을 받고 살기에 존재하는 길고 긴 그림자를.







 

작가의 이전글 [히든] 프레임 안의 삶, 그 너머의 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