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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Oct 26. 2021

[중독] 나를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랑이었기에

너를 울게 만드는 것들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문학적인 얼굴에 시같은 목소리를 가진 배우가 연기하는 파멸적 사랑. <중독> 한 남녀의 어떤 미쳐버린 사랑에 관한 얘기다.


 형의 아내를 사랑하게  대진이 형이 사고로 죽자 형의 영혼에 빙의된 연기를 하며 형수인 은수의 옆을 꿰차고, 은수도 어느 순간 대진이 죽은 남편에게 빙의된 것이 아니라 남편을 연기하고 있음을 깨닫지만 이미 아이를 가지게  이상 그를 거부할  없어 현실을 못본  하고 대진을 받아들이고 마는, 그야말로 파격적이고 충격적이고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나올  없고 기사였다면 비윤리적이란 이유로 보도금지가 걸렸을 법한 그런 막장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아침 드라마로 나왔다면 오렌지 주스를 다섯  정도는 뱉었어야  막장인데 이병헌의 얼굴은 놀라울만큼 문학과 같아서 존재 자체로 막장이 아니라 서글픈 사랑의 서사를 만들어 냈다.



호진인 척 연기 중인 대진



이렇게.






 나는 이 영화를 헐리웃 리메이크 판인 <포제션>으로 먼저 보았기에 이미 스토리나 반전을 다 알고 있었는데, 대진이 형이 빙의된 연기를 할 때 나도 모르게 그에게 감겨 들었다. 이거… 진짠가? 아니지? 하고 의심하다가도 진심어린 사랑에 절여진 대진의 눈동자를 보면 “어… 아니면 어때…?” 하는 부도덕한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비명을 질렀다. (헐리웃 판에서는 은수가 대진을 죽이려 해서 결말이 다르다.)


 엔딩의 10분은 왜 제목이 중독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파트다. 대진은 은수에게 중독되었고, 은수도 결국 대진의 사랑에 중독되고 말았다. 대진처럼 애타게 은수를 사랑하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은수의 존재를 한없이 긍정하고 모든걸 맞추어주는 사랑. 어느 누가 그 조건없는 무한한 사랑을 마다할 수 있을까. 대진이 은수에게 내리쏟은 사랑은 이기적이었지만 동시에 안되는걸 알면서도 마실 수밖에 없는 독배, 그 자체였다. 은수에게 대진이 ‘그러니까’ 였다면, 대진에게 은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였다. 세상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영화를 보는 내내 대진이 아팠다.

 그는 결국 사랑을 위해 거짓으로 무장하고, 혈육을 배신하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버려야 했다. 이제 그에게는 평생 형의 그림자 안에서, 형의 존재로만 살아가는 일만이 남았다. 미래는 없고 오래된 과거가 끝없이 되풀이 될 뿐인 시간이. 대진은 엔딩 시퀀스에서 형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지만 사실 그는 대진의 영혼과 다름없다. 이제 세상 어디에도 대진의 존재를 기억하고 알아주는 이는 없으니까, 대진 그 스스로도 자신을 죽이고 형으로 살아가기를 택하고 말았으니 자신의 소멸로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각기동대>에서 나왔던 대사처럼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위해 많은 부품이 필요하듯이, 자신이 자신답게 살려면 아주 많은 것이 필요하다. 타인을 대하는 얼굴, 자연스러운 목소리, 어린 시절 기억, 미래의 예감같은 것들. 그러나 대진은 자신답게 살기 위한 모든걸 버리고서 은수 하나를 택했다. 스스로의 존재를 소멸시키고 마는, 혹은 그래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비참한 사랑이 눈물겹고 애달프다. 대진은 결국 은수를 울게 만드는 저를 죽이고 말았다.

 

 영화의 엔딩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사랑은 사람을 어디까지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대진은 그 사랑을 얻어 행복했을까. 스스로를 파괴한 사랑의 끝은 어디인 걸까. 나였다면 달랐을까. 대진의 사랑을 거부할 용기가 있거나, 은수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병헌이야 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배우가 아닌가. 은수의 선택이 충격적이라고들 하지만, 도저히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는 얼굴을 볼 때면 은수가 선택한 파멸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종종 해서는 안될 사랑에 빠지고는 한다.

 사랑은 의지와 감정으로 다스릴 수 있을 때도 있지만, 가끔은 불가항력이기도 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외치며 사랑이라는 실체없는 감정에 매달리게 된다. 그건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고, 끊고 싶어도 끊어지지 않는 사탕같은 중독의 늪이다. 나를 갉아먹는걸 알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 그 절망적인 사랑의 마지막 길에 서면 결국 자기 파괴의 <중독>에 이르는게 아닐까.


그러나 사랑 앞에서 나라고 하여 달랐겠는가.

다만 벗어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원망할 따름이었을 것이다.





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사랑스런 모습으로
당신은 나를 스쳐지나간 것입니까

어쩌자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 겁니까
도대체 어쩌자고


/한 사람을 잊는 다는 건,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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