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능력이 상실된 사회?
살면서 불쾌한 영화를 본 일은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나의 감정을 건드렸던 작품을 꼽자면 바로 이 작품일 것이다.
아빠가 아들을 튀겨서 배달하는, <사랑은 단백질>이라는 한국 애니메이션.
사실 영화를 볼 때 불편이라는 감정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히든>이나 <퍼니 게임>, 혹은 <액트 오브 킬링> 같은 영화는 관객이 불편하도록 만든 영화다. 그것을 의도했고, 바라는 바와 뜻하는 것이 명확했으며, 그 안에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선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니, 영화를 보면서 불편한 것은 어쩌면 고발 영화에선 당연한 감정이다.
그러나 불편과 불쾌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른 영역의 감정이다.
퍼니 게임이 살인에 동참하는 듯하여 불편하였다면, 사랑은 단백질은 아들을 튀겨 파는 아빠가 '불편'한 게 아니라 그저 '불쾌'하다.
둘의 차이는 명백하다.
뜻이 있는가, 혹은 단지 조롱에 불과한가.
처음 이 애니메이션을 봤을 때, 나는 정말 순수하게 충격받았다. 어떻게 이렇게 창의적이게 잔혹할 수 있을까? 동족을 죽이고 삶고 튀겨서 배달하는 돼지와 닭, 그리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그들을 섭취하는 인간. 자식이나 친구를 죽여 판 다음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도 어이없이 잔인했지만, 심지어 닭이 모자라다고 아들을 죽이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육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 같지만, 비슷한 주제 같아도 <사랑은 단백질>과 <옥자>는 다르다. <옥자> 에는 적어도 생명을 향한 존중과 애정어린 시선이 담겨져 있었다. 옥자라는 존재와, 옥자를 사랑하는 미자의 관계성을 통해 공장식 도축과 육식에 대해 이야기한 <옥자>는 조금 불편할지언정 불쾌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은 단백질은 그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그 안에는 육식을 향한 시선이나 생명 윤리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기보단 그저 아들을 튀겨 파는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조롱만이 느껴진다. 그 앞에서 신나게 치킨을 뜯는 남자들의 모습에서는 자식을 잃은 부모를 향한 조소가 읽히기까지 한다.
아들을 살해한 아빠가 죄책감에 우는 것도, 그 앞에서 아들의 다리를 뜯어 먹는 것도, 다 먹은 뼈를 절구에 넣고 빻아 옥상에서 뿌려 주는 것도 무엇 하나 공감되거나, 동정심이 들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단지 잔혹한 설정과 상상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내가 이 영화에서 느낀 건 육식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약자를 조롱하는 시선이었다. 튀겨진 아들을 뜯어 먹으며 낄낄거리는 캐릭터에게서 나와 같은 인간성을 느끼거나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느껴야 그것이 죄책감이 되고 반성과 성찰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사랑은 단백질>에 나오는 인물들에게는 공감이나 문제 의식은커녕 그저 역겨운 불쾌감밖엔 느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식 잃은 부도 앞에서 자식을 맛있게 뜯어먹는다는 말인가. 아니, 제정신이 아닌 놈도 그러지는 못하리라. 혹자는 이 작품이 아빠 앞에서 아들을 먹는 사이코 같은 재호(공감능력이 부족한 인간)를 비판했다고 하지만, 기실 나는 어느 부분에서 비판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가 영화로 만들어 비판까지 해야 할 정도의 인물인가도 의문이다. 공감 능력이 바닥 난 인간들이 정상이 아니며, 멀어져야 할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던가.
"산 닭은 살아야 할 것 아니야! 핏덩이 같은 달걀이 얼마나 많은데."
이 대사가, 정말 자식을 잃은 부모를 위로하기 위해 넣은 말일까?
닭과 달걀이라는 말로 웃기기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나는 이런 영화가 좋지 않다.
자극적이라서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자극으로 타인, 그것도 약자를 조롱하기 때문에 싫다.
아버지를 튀겨 팔 수밖에 없었다는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사는 소상공인 아버지, 어리기 때문에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존속살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들, 그를 맛있게 뜯어먹는 사이코 같은 인물들의 등장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납득할 수 없는 설정과 이야기 속에는 오직 자극만을 위한 자극만이 존재했다.
<옥자>를 보며 미자와 옥자의 순수하고 다정한 관계에 대해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었고, 죄책감에 미쳐 가면서 옥자를 도축하려는 하는 미국인의 모습에서도 동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사랑은 단백질>은 그저 이질감만이 느껴졌다. 이러한 이질감은 영화에서 불편이 아닌 불쾌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생명과 육식, 구조 안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약자라는 중대차한 문제에 대해 다루면서도, 그에 대해 고찰하고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기보단 그저 잔인한 상상력에 자극적인 소스를 덧뿌렸을 뿐인 영화를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반드시 늘 다정하고 따뜻할 필요는 없다. <기생충>이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신랄하고 웃길 수도 있고 <소공녀>처럼 다정할 수도 있는 법이다. 정해진 방식도, 구체적으로 따라야 하는 시선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약한 자를 조롱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들을 웃음거리로, 오로지 조롱거리로만 만들어 소비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믿는 예술에 대한 신념이고, 내가 따라야 하는 방식이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