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공포가 존재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 자연 재해, 원초적인 것들에 대한 공포 또한 우리 주변을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는 현실적인 공포 중에 하나가 소외의 두려움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렛미인>은 언뜻 보면 그저 뱀파이어,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 같지만 사실은 소외의 공포, 그리고 실존에 관한 이야기다. 이 사회에 끼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언제나 한발자국 울타리 바깥에 서서, 웃고 떠드는 그들 사이에서 동떨어져 처절히 외로워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소년들이 존재하고자 앓아야 했던 열병이다.
엘리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왔다.
타인의 생명으로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열두 살의 소년은 몇 백 년 가까이를 홀로 살아왔다. 그는 빛을 볼 수도 없고 타인의 초대 없이는 집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 엘리가 살아온 삶은 끝없는 소외와 겨울 같은 온도였다. 조용하고 삭막한, 웃고 떠드는 따뜻한 테이블에는 소속될 수 없는 외로움으로 이루어졌다. 인간과 함께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엘리.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소년, 오스카 또한 학교에서, 혹은 집에서 어디에도 포함되지 못한 채로 부유하고만 있는 아이다. 그 둘은 외로움에서부터 파생되었고, 살아와야만 했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둘은 처음으로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게 된다. 오스카는 엘리를 사랑하게 되고, 엘리는 그에게 묻는다.
내가 '평범한 소녀'가 아니어도 사랑할 수 있어?
이는 단순히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일차원적인 사실을 떠나 더 큰 무언가를 묻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어떤 연인과 관계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내가 네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도, 좋은 조건을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나 자신, 타인” 을 사랑할 수 있냐는 물음이다. 동성애자거나,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사회에 소속될 수 없는 존재이거나 상관없이. 그래서 엘리에게는 그러한 약자의 특징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거세를 당한 소년이고, 가난하며, 사회에 속할 수도 없고, 어린 아이에 자라지도 못한다.
엘리에게 닥쳐 있는 수도 없이 많은 불행들은 너무나 거대해서 두려울 정도지만 오스카는 담담히 그를 받아들인다. 엘리의 정체를 알면서도 엘리를 집으로, 오스카 그 자신에게로 초대한다. 소년은 그 순간 엘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회적 외로움과 불행을 끌어안게 되고 그를 책임지게 된다. 엘리가 오스카에게 구원을 바랐을 때, 즉 호소했을 때 오스카는 응답했으며 그로부터 오스카는 존재하게 되었다. 엘리를 만나 타인과 관계를 맺고 책임을 지게 된 순간부터. 이 순간은 외롭고 공허했으며, 어디에도 존재하지 못하고 부유하던 이들의 만남이자 실존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 들이 만나, 서로를 보게 되는 순간.
평범한 소년인 오스카가 엘리가 뱀파이어임을 알면서도 두려움을 무릅쓰고 집 안으로 초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이 외로움에서 기인했다. 엘리와 오스카가 마주한 순간에는 얇은 창문 한 장으로는 닿을 수 없는 온기와 애정, 그리고 공감이 그들 사이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소외되어 본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그 초대받지 못한 자의 공포를 오스카는 삶의 순간들 속에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항상 사회의 해악이자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로 살아왔던 엘리에게 오스카의 순수한 환대와 초대는 지금껏 살며 느껴온 어떤 감정보다도 뜨거웠으리라.
이는 호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책임과 사랑, 그리고 존재의 문제인데, 호칸은 약자인 엘리를 사랑하고 책임을 지면서 자신의 존재와 자아를 성립하게 된다. 호칸은 엘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책임, 헌신을 표하며 자신의 세계와 사회에서 이질적인 엘리의 존재를 엘리 그 자체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타인에 대한 사랑이 곧 호칸의 존재를 정의하게 되며, 기억된다. 열두 살의 소년이던 오스카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사랑하고 존재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제목인 Let Me In, 들어가게 해 줘, 라는 말처럼 외롭고 소외된, 약자인 타인이 나의 안에 들어오기를 갈망하였을 때, 그리고 그를 받아들였을 때 소년은 진정히 존재하게 된다. 나의 욕망이나 이기심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이 오스카의 안에 들어온 순간이다. 인간은 그렇게 실존하게 된다. 타인으로부터, 타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랑하면서부터. 그래서 영화는 엘리와 오스카, 뱀파이어와 인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는, 사랑하는 타자에게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요즘의 많은 사랑들은 너무나 계산적이고 겁이 많아 타자의 불행을 외면하고 타자가 약자이기 때문에 거부한다. 그의 불행이 옮게 될까봐, 그를 통하여 내가 차지한 사회적 자위가 위협받고 사회 안에서 소외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의 자리에 앉아있는가.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정말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그냥 운이 좋기에 얻은 평범한 삶은 아니었을까, 저기에 소외된 존재들이 앉을 수도 있었던 자리를 빼앗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타자, 약자인 엘리가 손을 뻗었을 때. 내가 취해야 하는 행동이 무엇인가를 영화는 보여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의 존재가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이 인정할 것, 그를 포용하고 사랑하며 책임질 것을. 그리고 그것은 손해나 희생이 아닌 숭고한 사랑이자 타자와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나의 존재의 확립이라는 것을.
너는 늘 불행하지만
그게 너의 세계라면 난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수평선이 있는 풍경/ 김소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