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의 나누크>는 이렇다 할 대사도, 사운드도 없이 불안하게 이어지는 현악기 소리와 흑백의 화면으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맨 처음 보이는,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흐르는 나누크를 시작으로 카누를 타고서 돌아오는 가족들이 어떻게 혹독한 세상 속을 헤쳐 나가고 있는지를 조용하게 관망한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거의 대다수 생소하지만 동시에 일상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밥을 먹기 위해 사냥으로 고기를 잡고, 씹어 죽이고, 먹고, 집을 짓고 보수하고 잠을 잔다. 우리가 살면서 하는 가장 당연한 행동을, 화폐도, 어떤 특정한 직업도 필요 없이 살아가는 이누이트들 또한 그대로 한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가족, 식사, 집, 옷. 어찌 보면 삶의 가장 기둥이 되는 것만을 강건하게 지키며 사는 그들의 삶은 오히려 뜨겁게 다가온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한 번이라도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간다” 라고 느낀 적이 있었는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내가 하는 일은 만들어진 집과 만들어진 침대,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 타인이 운전하는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일 뿐이 아닌가. 언젠가 한 번이라도 내가 먹을 음식을 잡아 본 적이 있는지, 또 내가 입을 옷을 지어 본 적이 있는지. 그들에게 삶은 잠을 자거나 밥을 먹을 틈도 없이 바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인간의 욕구에 충실하기 위해 움직이는 일에 가깝다. 때문에 이누이트들의 삶은 단조롭고 지루해 보이는 한편 가장 열렬한 삶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정말 오늘을 살아 숨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0년 후나, 30년 후의 노후가 아니라. 그들을 보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오늘을 위해, 오늘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살았는가.
이 장면이 유달리 가슴 깊이 남았던 까닭은 끝없이 이어지는 빈 눈밭 위에 세워진 건물 때문이었다. 산도, 나무도 없이 황량하게 펼쳐진 이곳은 나누크 가족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고, 그들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내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춥고 외로워서 뒷걸음질을 치고 싶은 세상이지만, 이곳에서 나누크 가족들은 태어나 자라고 성인이 되며, 또 다른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 나오는 갓난아기가 자신의 자식에게 식량을 저장하는 방법과 사냥을 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렇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현대에 나오는 북극과 1920년대 이누이트들의 삶의 터전은 거의 다르지 않아서, 너무나 빠르게 변화해 따라가는 것조차도 벅찬 우리의 사회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의 삶과 문화는 느리게 이어지며, 아흔 살의 노인과 다섯살짜리 아이가 계속해서 같은 삶의 형식을 공유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이 깊게 다가온다.
어떤 이념의 전쟁도, 신념의 차이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삶을 가르치고 배우며 살아갈 나누크 가족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역사와 이데올로기 들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고 바뀌어서 40대의 기성세대와 20대의 신세대 간의 이야기조차 통하지 않는 차가운 시대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무시하며,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높은 빌딩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좋은 집과 따뜻한 옷을 쉽게 구할 수는 있을지언정 진심어린 대화가 통하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나누크 가족은 차가운 북극 위에 삶의 기반을 세웠을지언정, 그들은 가족과 가까이 살아가고, 오늘 하루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삶을 공유하는 법을 배운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고, 하루 9시간을 사무실에서 죽은 듯이 일하고, 버스를 타고 퇴근해 혼자 저녁을 먹고 잠에 드는 나는 매일 '죽어 가고' 있다고 느끼지만, 아마 그들은 매일을 '살아가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 삶이야말로, 생(生)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도, 100년 전의 이누이트에게 삶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