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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Feb 13. 2024

진짜 1세대 아이돌, 프란츠 리스트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막내 외사촌형은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에 다녔다. 형이라고 해도 나이가 8살이나 차이 나긴 하지만, 가장 가까운 터울인 형이고, 학교도 서울이다 보니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곤 했다. 어릴 때는 완전히 나만의 시각으로 우리 집에 오면 재미있고 좋지 않나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하거나 또는 노느라 바쁜 대학생이, 간간히라도 고모(내 어머니)한테 예의 갖춘다고 눈도장 찍으러 와서 나랑 놀아주고 했던 게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요새 대학생들한테 그러라고 하면 몇 명이나 그럴 수 있을까. 외가 집안에서는 공부만 잘하지 붙임성이 부족하다고 혼나던 형이었는데, 돌아보면 형은 꽤 억울했을 것 같다.


 형은 대학에 가서 클래식 동아리에 들어갔다. 가서 정말 이것저것 많이 한 것 같다. 피아노도 치고, 바이올린도 하고, 성악까지도 했는지 자기 결혼식 축가를 형수님이랑 같이 성악곡으로 불렀다고 한다. 나는 군 복무 중이라 가지 못했다. 형이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예로부터 악기는 최고의 구애 도구가 아니겠는가. 구애의 측면에서 최고의 악기는 역시 사람의 목소리일 것이고, 그게 부족한 사람이라면 악기에 관심을 가지겠지만, 어릴 적 체르니 30번 정도치고 떠났던 피아노를 다시 만나면 캐논 변주곡 정도 치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형은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처럼, 피아노도 구애의 도구로 쓸 만큼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2000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2학년이고 형은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형이 집에 와서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를 들려줬다. 바이올린으로 메인 선율을 몇 초간 들려줬는데, 솔직히 곡이 너무 멋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들을 수 있는 건 10초 남짓이었고, 형은 이게 바이올린으로는 이만큼 밖에 못하는데, 피아노는 좀 더 연습하면 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의 메인 멜로디를 피아노로 들려줬다. 아무래도 바이올린보다는 피아노와 조금 더 친숙했던 나는, 형이 돌아간 후에 당시 mp3 다운로드 프로그램이었던 소리바다를 열심히 뒤져 Liszt - La campanella라는 곡을 받았고, 한껏 중2병에 걸려있던 사춘기 소년에게 이 초절기교 연습곡은 피아노에 대한 심각한 인식 변화를 일으켰다. 나는 6학년 때 드렁큰 타이거의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라는 곡을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는데, 그때의 충격으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국 대중가요는 다 쓰레기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살았었다. 리스트와의 만남은, 클래식에서도 유사한 인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리스트 미만 잡 이딴 생각.




 대학생이 되어서, 음대생들과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여대랑 도보거리로 붙어있었는데, 나는 공대생이다 보니 개강 파티를 여대 특정 학과와 함께 하는 게 관례적이었다. 신입생 때 신기하게도 음대 건반학과랑 같이 하게 되었는데, 조금 늦게 도착하다 보니 다들 자리를 잡았었고, 한 살 차이가 뭐라고 무서워서 서로 가지 않으려고 했던 재수생 누나들이 4명 있는 테이블에 배치됐었다.


 한 살 차이에 어린애 취급을 받으며 술잔이 몇 번 오가면서, 누나들은 무슨 곡을 치는지 물어봤었고, 누나들은 말하면 아냐는 식으로 몇 개 얘기를 해 줬다. 곧 신입생 연주회가 있는데, 쇼팽 발라드 4번,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0번, 쇼팽 스케르초 1번, 리스트 파가니니 초절기교 연습곡 6번, 이렇게 4개를 친다는 것이다. 오늘 들었으니 신입생 연주회 꼭 오라는 말과 함께. 그 후로는 별 의미 없는 대화만 했던 것 같다.


 며칠 뒤, 신입생 연주회에 가서 누나들의 연주를 보면서 느낀 충격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사람들한테 이야기할 정도로 엄청났다. 술자리에서는 정말 쓸데없는 얘기만 하면서 대학교 신입생의 세속적인 모습만 봤었는데,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말 그대로 미친 사람처럼 피아노 위를 달려가는 모습에, 아 이게 피아노에 인생을 쏟은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때 리스트 파가니니 초절기교 연습곡 6번을 쳤던 누나의 그 광기 어린 모습은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연주할 수 있다면 사람이 아예 다르게 보일 만큼, 리스트는 피아노 세계에서 절대적인 존재다. 쇼팽과 절친한 친구로서 동시대를 지낸 사람이지만, 중년부터 점점 불행해졌던 쇼팽과 달리, 리스트는 유복하고 행복했으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살았다. 원래도 미남의 정석이라 불리며 인기가 많았지만, 파가니니의 음악을 접한 이후로 리스트는 큰 충격을 받았고, 파가니니처럼 사람들을 휘어잡는 미친 듯이 화려하고 과시적인 음악들을 만들어내면서 더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리 다구 부인이라는 피아노 사교계의 유명인사, 지금으로 보면 인플루언서 같은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에 이른다. 이때가 리스트의 포텐셜이 터지기 시작한 시점이다. 엄청난 곡들을 쏟아냈으며, 수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힘들게 살았던 리스트에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기에, 가정에는 충실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한 여러 불화들로 인해 리스트와 마리 다구는 결국 결별하게 된다.


 돌싱이 된 리스트는 이제 거리낄 게 없었다. 특유의 스타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유럽 전역을 넘나드는 공연을 통해 부와 명예를 손에 쥐기 시작했다. 리스트는 그랜드 피아노의 뚜껑을 열어서 관객 쪽으로 음악을 반사시키는 각도로 고정하는 것의 시초이며, 그 외에도 여러 무대장치를 통해 연주회를 극적으로 이끌어가는 데에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연주가 끝나면 리스트가 던졌던 시가 꽁초나 장갑 따위를 차지하려고 귀족 부인들이 달려들었고, 리스트는 돈과 인기, 많은 여성들과의 잠자리까지도 얻으며, 그때까지 그 어떤 음악가도 누린 적 없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음악가들을 천하게 여기던 귀족들과의 관계에서, 귀족 그 이상의 지위로 뛰어올라가면서 음악가가 왕처럼 군림하게 되는 시대를 연 사람. 현대 아이돌 팬덤의 시초가 리스트라는 것은 음악사적 관점에서 별 다른 이견이 없는 부분이다. 말년까지도 리스트는 딱히 어려움 없이 노쇠해서 죽음을 맞게 된다. 쇼팽이 그러했듯, 리스트는 헝가리가 낳은 최고의 아웃풋이 되었고, 그렇게 부다페스트의 공항도 프란츠 리스트 국제공항이 되었다.




 어떤 이야기적 아름다움의 측면에서 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음악 외적으로 감동을 주는 것은 없다. 다만 음악 그 자체가 워낙 화려하고 멋지기 때문에, 리스트의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베토벤의 청각 손실과 그 열정, 바흐의 고민, 라흐마니노프의 우울증 같은 작곡가의 스토리를 제쳐두고라도 그 자체로서 충분히 재미가 있다. 누군가가 클래식 피아노 음악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음악이라는 생각을 할 때, 가장 먼저 접하면 좋을 음악이 리스트의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도파민에 절여진 현대인의 귀에도 심심하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멋진 곡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초절기교 연습곡 12곡, 파가니니 초절기교 연습곡 (파가니니 주제 대연습곡) 6곡은 한 곡도 거를 게 없다. 그중에서도 이 정도는 꼭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곡들을 링크하며 글을 마친다. 쇼팽 에뛰드와 마찬가지로 한 곡이 길지 않으니, 모두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4번, 마제파(Mazeppa), 장인규(비전공자)]

https://youtu.be/Ryl687qtuEI?si=VeJuOispTTW5qfgG

서울과학고 음악수업으로 유명한 영상. 리스트를 연주하는 게 얼마나 멋진 후광효과를 주는지 실감할 수 있다.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5번, 도깨비불(Feux follets), 임윤찬]
https://youtu.be/Ifk5Swd8WHk?si=Ky6HzrsAlaNHQ1t7

초절기교 연습곡 12곡 중 12번과 함께 가장 테크닉 관점에서 어렵다고 평가되는 곡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8번, 사냥(Wilde jagd), 임윤찬]

https://youtu.be/NZpzuXABILk?si=ltrQ2uIxpAfAx1C7

개인적으로는 초절기교 연습곡 중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곡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0번, 열정(Appassionata), 조성진]

https://youtu.be/uDbZ-AcgmDE?si=GXKw2ckocuDMGZ2x

리스트 곡을 쇼팽이 치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해석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2번, 눈보라(Chasse-neige), 임윤찬]

https://youtu.be/ANCV3uG1GBg?si=TYX_u1levsGNkA9f

초절기교 12곡을 콩쿠르에서 내리 연주한 임윤찬의 노력이, 가장 마지막 가장 힘든 곡에서 더 빛나는 영상 


[리스트 파가니니 주제 대연습곡 3번,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에브기니 키신]

https://youtu.be/B9q7zDwUEz0?si=KXbWV_D1-c-eLXKF

너무나도 유명한 곡. BlackPink가 아이돌 대 선배인 리스트의 곡을 샘플링하여 Shut Down을 만든 게 재밌다. 


[리스트 파가니니 주제 대연습곡 6번, 주제와 변주(Theme et variation), 알렉산더 루비얀체프]

https://youtu.be/7Blf8Y527DY?si=3OVJaQ38hxlzZlWS

리스트의 모든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 원곡인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도 못지않게 유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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