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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Apr 25. 2024

거의 끝나간다

   그는 한평생 오너로만 살아왔다. 그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거나 누군가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일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을 뿐더러 실제로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만큼 오너가 썩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그는 학원의 오너였다. 비록 그 학원이 다 빚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그리고 아무리 빚이 많아도 좋은 옷을 입고 돈을 여유롭게 쓰는 것, 그것이 오너의 자질이라고 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너의 자질 중 일부만 떼어 갖고 있으면 평범하게 살기도 힘들다.    

  

  서울에서 밀려난 후에도 대학교 때 보았던 부유한 서울 친구들처럼 살고 싶다는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내게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그는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줄 요술램프 속의 지니 같았다. 그는 월급을 많이 주진 않았지만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내가 바라는 대로 살 수 있다는 비전과 희망을 주었다.


   그는 천상 오너였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일찍 출근할 필요도 없었다. 원래 오너는 그런 거라고 했다. 결정적인 것 한 방이나 방향과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 평범한 사람들이 삼백육십오일 온종일 발발거리면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는 화가 많았다. 식당에 가면 항상 테이블이 지저분하다고 화를 내고 백화점에 가면 점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권한다고 화를 내고 상담 온 학부모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도 화를 냈다. 아줌마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을 유독 못 참아했으며 세상에는 한심하고 어리석고 게으르면서 불평불만만 많은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화를 냈다.     

   뚜렷한 성장캐였던 나는 국어 수업을 가장 잘한다는 명성을 곧 얻었다. 선생님을 면접 보아 뽑는 일도, 퇴직한 선생님이 노동청에 진정을 해서 근로감독관을 만나는 일도, 어느 해 갑자기 몇 배로 뛴 종합소득세 때문에 세무서의 담당 직원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돈봉투를 건네는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을 벌어 학원을 홍등가에서 학원가로 옮길 때 소방서, 교육청, 세무서 등등 관공서로 뛰어다니며 서류를 보완하고 도장을 받고 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그는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공무원들과의 일을 잘 해결한다고 했다. 그가 소설 따위를 모조리 쓰레기차에 실어 보내고 위기는 위험한 기회임을 역설하는 자기 계발서만 읽게 한 덕분에 나는 배우고 성장하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아직 학원이 자리잡지 못해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출산이 가까운 부른 배를 안은 채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해서 강의실과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을 때도 나는 그가 돕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청소도 직접 해 봐야 청소 아주머니가 청소를 잘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훗날 내가 오너가 되었을 때 사람들을 잘 부리려면 모든 것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아침 열 시부터 자정까지 일해도, 방학 때면 열세 시간씩 수업을 해도, 하루에 한 끼밖에 못 먹어도, 자정까지 일하고 정확히 열 시간 후 딸을 낳았어도, 딸을 낳은 후 4주 만에 다시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출근을 해도, 돈을 받아오라는 엄명을 받고 학원비를 몇 달째 내지 않는 학부모의 집 앞에서 추위에 떨면서 몇 시간씩 기다려도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서 내가 보았던 서울 친구들처럼 딸을 키울 수 있다면 하나도 힘들 것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 버는데 그 정도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그 돈이 내 손에 쥐어지지 않았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돈이 내 손에 쥐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화투, 바다이야기처럼 유행하는 노름을 이어가도 내가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더 많이 버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노름은 끊을 수 없다고들 하니까.

      

  힘들었던 것은 그가 나에게 일을 가르치던 방식이었다. 그는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알아야 했다. 교육청에 새 학원 인가를 받으러 갔다 오면 교육청 직원이 무슨 말을 했고 무엇을 물었고 나는 어떤 말을 했고 어떤 대답을 했는지 아주 오랫동안 모든 것을 복기하여 보고해야 했다. 너무 세밀하게 묻거나 내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그에게는 중요한 적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는 밤을 새우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멍청하다고도 했다. 가끔은 나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그 시간을 견디면서 잠을 자야 내일 일을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관공서에 갈 일이 있으면 수없이 많은 시나리오를 생각해서 그에게 묻고 확인하고 점검하고 대비했다. 이런 걸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저런 걸 물으면요? 또........ 그래 봤자 사람의 일이라는 게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나는 혼났고 멍청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덕분에 철저하고 꼼꼼하고 실수가 적은 사람이 되어 갔다. 그 덕분에 학생과 학부모의 신망을 받는 사람이 되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방학을 대비한 광고를 제작해야 한다거나 1년에 한 번 하는 소득 신고 같은 매우 특별한 일만 아니라면 그가 학원에 전혀 출근하지 않아도 나 혼자 학원을 굴려 가면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그런 일들도 내가 더 잘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소량의 일이 필요했다. 혹독한 훈육 과정을 거친 나는 그가 지시하는 것을 충실히 이행함은 물론 말하지 않는 것까지 헤아려서 이행하는 심복이 되었고 원장이 되었다.        

      

   딸을 낳고 나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두 배, 세 배가 되었다. 아침이면 정장 차림 위에 띠를 매고 딸을 얹은 후 구두를 신은 채 돌봐 주는 집에 데려다줘야 했고 자정에 일이 끝나면 다시 그 집에 가서 딸을 데려 온 후 목욕을 시켜야 했고 엄마와 놀고 싶어 밤에도 자지 않는 딸과 놀아 주느라 잠을 더 줄여야 했고 중간중간 우유병을 물리느라고 몇 시간 자는 밤잠도 설쳐야 했고 주말에는 또 딸을 데려와 돌봐야 했으니까. 그리고 꼭 서울대에 가야 할 딸이라고 하니까 공부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했고, 머리는 춘향이 머리를 해야 한다고 해서 허리까지 기른 머리를 밤마다 빨고 말리고 다음 날 빗고 땋고......

              

  한 번 결혼에 실패했던 그는 나를 만나 완벽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고

  한 번 서울에서 실패했던 나는 그를 만나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2019년 유방암 3기 선고를 받을 때 의사와 혼자 마주했던 나는 울지 않았다. 별로 슬프지도 않았다. 의사가 죽지는 않는다고 했다. 산으로 가서 자연의 도움을 받겠다며 고집을 부린 사람들 때문에 낮아지는 것일 뿐 의사가 시키는 대로 치료하면 생존율도 아주 높다고 했다. 한편으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후련했고 심지어 내가 그런 순간을 기다려 온 것 같기도 했다. 세기말 세계를 휩쓸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상황을 일거에 종말시킬 한 방을.     


   이제 혼자 돈을 벌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그에게 말할 권리, 부모님이 결사적으로 반대한 남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었던 '어디 한번 살아 봐라'라는 말을 그만 들을 권리,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딸이니 면죄부를 달라고 이십 년 간 못 본 친정아버지에게 부탁할 권리, 서울에 입성하면 나는 학원 일에서 은퇴해서 딸 뒷바라지하고 그가 돈을 벌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할 권리, 그리고 그에게 그동안 당신이 하는 노름  때문에 사실은 미칠 지경이었으니 이제는 그만두라고 화를 낼 권리가 암에 걸린 덕분에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이 세 가지 있었으니 돈, 운전면허, 사람이었다. 쓸 데가 있으면 언제든지 자신이 내어 주고 필요한 것은 다 사주기 때문에 돈이 필요 없다고 했고, 택시도 있고 대리기사도 있고 운전도 잘 못할 것이 분명하니 운전면허가 필요 없다고 했고, 큰 책장 두 개 분량의 소설 나부랭이를 몽땅 폐기 처분하면서 머릿속 똥을 다 빼고 새 사람이 되어 내가 부러워하던 서울 친구들 같은 인생을 살려면 허접한 때 알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잊으라 했다.     


   돈은, 그래도 조금씩 모았다. 아니 모아졌다. 돈을 쓸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돈이 좀 모아지면 때마침 세금이나 광고처럼 학원에 목돈이 들어갈 일이 생겼다. 그는 금세 돌려준다고 했다.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내 표정이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눈에 띄게 어두워지면 비싼 물건을 사 줬다. 핸드백이나 코트, 구두.... 또는 친정 부모님 선물을 사서 보내 주었다. 혹은 딸의 휴대전화를 새로 사 주거나 영어 캠프를 보내주었고 내가 크게 아파 병원비가 많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돈을 돌려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물건이 필요하면 직접 사줬고 돈을 쓸 데가 있으면 카드를 내줬다.     


   운전면허가 없었지만 택시를 탈 돈이 있었다. 강원도 소도시에서 십여 년 살 때는 오전에 딸을 키워 주는 집에 데려가고 자정 넘어 데려 오고, 최소 하루 두 번 이상 콜택시를 불렀으니 도시의 콜택시 기사님들이 나를 모조리 알 정도였다. 문제는 그도 운전면허가 없다는 것, 운전면허를 딸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비싸다는 차는 세워 두고 서울에서 경기도로의 출퇴근 길은 물론이고 주말마다 강원도 곳곳을 택시로 누볐다.     


   사람은, 처음에는 그의 호통과 강요로 원래도 많지 않던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지만 그에 대해 하나 둘 알게 되면서 나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와도 얘기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아야 딸을 키울 수 있었다.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기로 했다. 임신 초 잦은 하혈로 유산의 고비가 왔을 때도 그의 허락이 내려지지 않아 쉬지 못하고 일했던 나의 자궁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어 준 딸, 임신 5개월 차 중절 수술을 받으려고 찾아 간 산부인과에서 5개월까지 고민했다는 건 낳아야 하는 거라고 설득한 의사 선생님 덕분에 살아남은 딸이 있었다. 그리고 내 선택을 실패로 인정하기 싫은 나의 자존심도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다.     


    2019년 11월 28일 목요일에 입원하여 첫 항암 치료를 받고 금요일에 퇴원했다. 2차 항암 치료부터는 구토방지약, 두통약 등 각종 약들을 챙겨서 퇴원했지만 처음에는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지 모른 채 무방비였고 묻지 않는 것을 환자에게 말해줄 만큼 대학병원의 의사들은 한가하지 않았다. 의사 말로는 최소한 일주일은 많이 힘들 거라고 했고 내가 체격이 왜소한 만큼 체력도 약해서 더 힘들 수도 있다고 했다.


  하루 뒤 토요일이 되자 이십 년간 그랬듯 그는 딸과 나를 남겨 두고 노름을 하러 갔다.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 부인처럼 내가 이렇게 아픈데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일어서기만 하면 구토가 나오려고 했지만 끼니를 배달시켜서 딸과 함께 먹고 치웠다. 종종 월요일 오후에 돌아오던 그였지만 용케 일요일 밤에 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내일 1시에 대리기사가 오니까 택시 대신 우리 차를 타고 같이 출근하면 된다고.     


   월요일이 되자 그는 나 대신 일찍 일어나 딸을 깨우고 택시를 타고 아직도 전학의 여운이 남아 낯선 학교에 딸을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그리고 누룽지를 끓이고 콩자반과 깍두기를 차려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잤고 나는 도대체 얼마 만에 먹는 아침밥인지 알 수 없는 누룽지와 콩자반과 깍두기를 먹은 후 그릇을 치우고 거실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하나씩 출근 준비를 했다. 샤워를 하고 한참 누웠다가 쿠션을 찍어 바르고 한참 누웠다가 눈썹을 그리고 한참 누웠다가 블라우스를 입고 한참 누웠다가 치마를 입고 한참 누웠다가 스타킹을 신고...... 그렇게 하니 1시가 가까워졌다.     


   4주 후에 딸의 외고 면접이 있었고 학원에도 경기도의 외고, 국제고에 원서를 낸 학생들이 있었다. 출근을 안 할 수가 없긴 했다. 오후 1시에 대리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경기도 학원에 도착해서 항암 치료를 한 지 나흘밖에 지나지 않은, 건강보험공단이 공식적으로 인증한 중증환자가 소파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며 일을 했다. 날 선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쳐도 차의 창문을 닫을 수없을 만큼 속이 미식미식했지만 오후 4시가 되자 다시 대리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딸을 데리고 경기도 학원으로 왔다. 내가 암 치료를 시작하면서 굳센 금순이처럼 결심한 것이 '딸에게 변함없는 모습을 보인다'였으니까. 그리고 밤 10시에 퇴근을 하고 다시 서울 집으로 왔다. 서울서 경기도로 출근, 딸을 데리러 경기도에서 서울로 갔다가 다시 경기도로, 마지막으로 경기도에서 서울로 퇴근, 대학 입시의 추가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것처럼 긴 하루였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는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이면 다시 노름을 하러 갔다. 그래, 2차 항암 치료 전까지만 이렇게 하자, 학원 아이들 인생이 달린 문제인데 자소서 마무리하고 면접 대비는 해 줘야지, 몇 년을 학원에 다닌 녀석들인데 아무리 아파도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그다음에는 내가 얼마나 아픈지 알리고, 그다음에는 치료에만 전념해야지.......     


   2차 항암 치료 이후에도 그는 계속 아침밥을 차려 주었고 내가 해야 하는 일들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학원 선생님 한 분이 갑자기 그만두셨고, 겨울방학 프로그램을 설명받고 싶어 하는 학부모들이 많았고, 광고 초안에는 오탈자가 많았고, 딸의 중학교 졸업식과 입학할 외고의 모임이 이어졌다. 나는 머리카락과 함께 빠져버린 발톱이 있던 자리에 밴드를 말고 여전히 열심히 일했다.      


   그런 생활은 결국 4차 항암 치료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대망의 수술일이 다가왔다. 항암제가 양동이 분량으로 투하돼도 나의 암 덩어리는 시큰둥했다. 의사 선생님은 암 덩어리를 줄이는 건 깨끗이 포기하고 이제 수술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선택하라고 했다. 절제만 할 것이냐, 성형까지 할 것이냐. 대중화되지 않은 로봇 수술을 잘하는 의사였던 담당의는 로봇 수술을 하면 성형까지 한 번의 수술로 끝낼 수 있다고 했다. 또 정면이 아니라 겨드랑이 쪽을 가르기 때문에 흉터도 잘 보이지 않고 작다고 했다. 그 밖에도 출혈이 적고 회복이 빠르고 등등 수많은 장점이 나열되었다. 병원의 상담 직원은 내 보험을 점검하더니 실손 보험을 들어 놨으니 로봇 수술비도 다 보험사에서 나올 거라고 했다.     


   로봇 수술을 하여 성형수술까지 할 이유는 많았고 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나는 푹 파인 가슴을 씻을 때마다 매일 들여다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입원 기간이 문제가 됐다. 절제 수술만 하면 일주일에서 열흘, 성형까지 하면 보름에서 이십일 정도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절제 수술만 하자고 했다. 어떻게 이십 일씩이나 입원을 하냐고 했다. 나보다 열다섯 살이 많은 그로서는 왜 굳이 보형물을 집어넣는 불필요한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 못 할 수도 있었을까. 딸이 나 대신 펄쩍 뛰었다. 길어봤자 고작 열흘 차이인데 당연히 성형까지 해야 한다고, 인터넷 검색해 보니까 성형 안 해서 후회한 사람은 있어도 성형해서 후회한 사람은 없더라고, 자기는 엄마랑 다시 목욕탕 가고 싶다고.......     


   딸 덕분에 나는 성형까지 병행하는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수술은 일곱 시간이 넘게 걸렸고 보름 정도 입원한 후 겨울철 가로수를 새끼줄로 꽁꽁 동여매듯 거의 상반신 전체에 압박 붕대를 감고 숨이 턱턱 막힌 채 퇴원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나는 출근을 해야 했다. 원장의 공백이 너무 길었다고 했다.


   수술 후 남은 두 번의 항암 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노름을 하러 가는 주말만 빼고.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모를 만큼 맹렬히 일해야 했던 가혹함 덕분에 나는 울타리를 부수고 나올 수 있었다. 만약 그 시간에 그가 너그러움을 발휘해 나를 쉬게 해 주고 치료에만 전념하게 해 주었다면 나는 다시 이십 년을 똑같이 살았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여간 혹독하게 대하지 않으면 끝없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고 참고 또 참는, 인내심의 임계점이 너무 높은 사람이니까.


시간이 흘러 딸은 대학생이 되었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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