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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Apr 27. 2024

가스라이팅, 필요합니다

    연대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왜 연대를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 답변은, 


   '서울대에 떨어져서'입니다. 그래선지 입학 초기에는 아쉬움을 뚝뚝 떨구고 다니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저의 딸도 그랬습니다. 정시에서 과감하게 한 장의 카드는 버리고 서울대와 연대 정치외교학과만 지원했다가 서울대에 낙방하는 바람에 연대 학생이 되었죠. 


   올해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정시(일반) 경쟁률이 거의 4대 1에 육박했으니 떨어진 학생들 상당수가 연대나 고대 정치외교학과로 밀려났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그런 학생들은 입학을 위한 절차를 밟으면서 종종 부모님께 서울대에 미련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자기 미련을 떨치기 위한 질문임을 아는 일부 부모님들은 일말의 미련도 없다, 지금의 결과에 완전히 만족한다는 약간의 거짓말을 섞은 답을 합니다. 완전 거짓말은 아닌 것이 재수나 삼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요. 하지만 일부 학부모님들은 자녀의 입시 미련을 재수나 삼수라는 고되고 당찬 도전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자녀가 원하는 대답이 그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삼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 연대를 선택했던 딸이 요즘 연대 사랑에 빠졌습니다. 연대 다닌다고 섭섭해할 때는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막상 너무 행복하게 학교 생활을 하는 것을 보니 서울대 간다고 큰소리치며 재수시켜 달라 할 때가 생각나 얄밉기도 할 정도입니다. 확실히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고려대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나라 대학 구조에서 연고대는 좀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가 연고전이죠. 대한민국의 어느 두 대학이 그런 축제를 열고 뉴스에까지 등장하겠습니까? 연고전이 맞다, 고연전이 맞다를 두고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는, 두 학교는 단짝이며 앙숙입니다. 


  사실 딸은 서울대에 못 가면 고대에 가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고대의 투박하고 소박한 이미지와 똘똘 뭉치는 충만한 연대감이 맘에 쏙 든다면서요. 그에 비해 연대는 너무 세련된 이미지에 개인주의 성향, 왠지 강남스러운 분위기가 강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제가 대학생일 때도 그런 일반화가 있었는데 여전한가 봅니다. 


   그랬던 딸이 요즘은 틈만 나면 고대와 비교하며 연대의 우월성을 증명하려고 듭니다. 서연고라고 하지 서고연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유치한 증거를 대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영어로는 스카이라고 하니까 고대가 먼저 아니냐고요. 고대의 빨간 점퍼보다 연대의 파란 점퍼가 더 예쁘다, 고대의 호랑이보다는 연대의 독수리가 더 멋있다는 둥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증거를 대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누구보다 낫다고 자꾸 자랑하는 것 자체가 열등감 아니냐고요.


   물론 딸도 장난이고 저도 장난입니다. 하지만 대학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학생들을 가스라이팅 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연대만 해도 과선배와의 밥 약속(일명 '밥약'), 합동응원전(일명 '합응'), 연세대학교 돌멩이(일명 '연돌')에서 단체 사진 찍기, 고대 정치외교학과와의 교류 등 소속감을 심어주려는 다양한 가스라이팅이 연일 펼쳐집니다. 


   서울대 못 간 아쉬움에 재수나 삼수로 이탈하는 학생들이 워낙 많다 보니 생존을 위한 몸부림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의대 몸살을 얼마나 앓는지 이공계의 경우 연대조차도 정상적인 학사 운영이 어려울 지경이라고 합니다. 첫 학기 휴학이 불가능한 신입생들을 송도에 묶어두기까지 하는 것은 재수방지를 위해서라는 우스갯소리가 항간에 떠돌 정도입니다. 


   작년인가 언론에서 화제가 되었던 뉴스가 있습니다. 모 대학 모 과의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학생이 며칠 후 다른 대학 입학에 성공했다면서 작별의 인사말을 남긴 것이었죠. 일부에서는 책임감이 없다, 다른 대학에 원서를 냈다면 양심적으로 회장 선거에는 나오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의 선택과 도전을 지지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열망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연대의 가스라이팅,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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