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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May 21. 2024

맹자는 좋았을까요?

   서울에 산 지 이십 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서울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서울 사람들이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여전히 서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설이나 추석에도 그냥 집에 있는 사람들, 고향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서울 사람들은 '내 고향은 대치동이야' 혹은 '내 고향은 강남구야'라고 말하기도 하는가요?


   혹시 너무 똑똑한 사람들 속에서 치여 본 적 있으신가요? 비평준화 시절 지방 명문고에서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 정도는 아파트 단지의 미끄럼틀 수준이었습니다. 에버랜드의 T 익스프레스를 타는 것처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붙잡아야 하는 학교들이 서울에는 즐비합니다. 비용 차이도 그만큼 납니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는 공짜고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 됩니다. 에버랜드는 입장료가 비싸고 먹는 것, 마시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돈입니다.


  딸은 대원외고를 졸업했습니다. 그 학교는 뭐랄까.... 다녀 보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입니다. 졸업한 후 거리 곳곳마다 보이는 프랜차이즈 사업체를 일군 선배들, 대형 로펌 변호사가 되어 주말도 없이 하루 열몇 시간씩 일하는 선배들이 모교에 방문하면 빠지지 않고 후배들에게 건네는 덕담이 있습니다. 대원보다 더한 집단은 없다. 대원에서 하던 노력의 반만 해도 어디서든 성공한다. 재학생들 입장에서는 덕담인지 악담인지 아리송합니다. 수능 만점을 받고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원에서 하던 공부의 오분의 일만 해도 로스쿨 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


   저는 경기도에서 일반고 아이들을 이십 년간 지도하면서 그중 3년은 대원외고를 다니는 딸의 국어도 가르쳤습니다. 학습량의 차이가 얼마나 나느냐고 묻는다면 차마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대기업 총수의 재산이 얼마라고 숫자로 공개되어도 그 금액의 크기가 현실적으로 체감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딸은 대원외고에서의 경쟁에서 졌습니다. 어떤 선생님은 비강남권 출신으로 기적 같은 성적을 냈다고 하셨지만 어쨌든 졌습니다. 난생처음 겪는 엄청난 열등감은 보너스로 따라왔습니다. 딸이 질 때마다 후회하고 미안했습니다. 더 어릴 때, 더 진작 대치동으로 입성했어야 했는데 엄마가 엄마 일을 포기하지 못해 이런 사달이 났다고요. 맹모삼천지교가 늦어도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경기도에 살았지만 대치동처럼 공부했다고 생각했으나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며느리를 딸처럼 여긴다고 해서 며느리가 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처럼'은 이미 가짜인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딸은 수능에서의 경쟁에서는 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전국 싸움이니까요. 딸은 재수를 하면서 자신감과 안도감을 되찾았습니다. 하루 열네 시간씩 말 한마디 못하고 대치동의 좁은 강의실에 갇혀 공부만 했지만, 일 년 동안 햇빛을 쬔 양을 따지면 드라큘라 백작보다도 적었을 것이지만, 대원외고 다닐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편안했다고 합니다.


    딸은 다시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대원외고를 선택하지 않겠지만 대원외고에 진학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게 후회할 필요도,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경기도 소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누렸던 행복과 즐거움, 친구들과의 추억도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더 일찍 대치동에 입성했더라면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더 일찍 대치동을 선택하지는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게 될 거고 자신은 대치동 스타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바뀔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네요.


    그리고 재수학원을 거쳐 연대를 다녀 보니 알겠다고 합니다. 적어도 공부에서는 대원외고보다 힘들 일이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없다는 것을요. 이런 것도 고진감래, 전화위복인가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이야기지만, 그리고 아직 인생이 창창한데 섣불리 예단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맹모삼천지교도 맹자니까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사 다니던 맹자는 좋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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