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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위시 Oct 02. 2022

떠나보내는 마음에는 굳은살이 배기지 않는다

2주가 흘렀다. 그 2주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나와 남편은 아이가 잘 커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임신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친정어머니는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친척들의 단톡방에도 공개해 버렸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잘 커준다면 이 소식은 계속해서 희소식이 될 예정이니까. 동시에 나는 구글과 맘 카페, 유튜브를 정주행 하며 유산 가능성에 대하여 리서치를 멈추지 않았다. 너무 희망차기만 하면 좌절했을 때 내 마음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습관이 있다. 유산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굳은살이 배겨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망의 초음파 날, 초음파를 시작하자마자 초음파 기사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남편은 계속 아닐 거라 했지만, 나는 그때부터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최악의 사태가 현실이 되었구나. 내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내가 유산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유산이 진행되었던 것일까? 이번에는 분명 몸조심 열심히 했는데 임신이 확정되고 일을 쉬었어야 했던 것일까? 이미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수백 번도 더 돌려보았지만, 막상 현실이 된 그때, 나는 더욱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며 자책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누가 봐도 당장 결과를 알려야 할 때는 회사에 상주하고 있는 영상의학과 전문의를 바로 방으로 불러온다. 그날 일했던 전문의는 닥터 S 였는데, 그는 당시 우리 회사에 갓 새로 들어온 의사였다. 당연히 내가 누군지, 내 히스토리는 어땠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약간의 위로와 함께 약간은 건조하게 의학적으로 무슨 상황이 발생했는지 설명해주었다. 아이는 2주 전 그때, 이미 내 안에서 더 이상 크지 못했었다. 사람의 형체를 하려고 했던, 머리와 몸이 분리되던 그 아이는 어느새 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조각이 되어 따로 놀고 있었고 크기도 전혀 자라지 않았다. 무엇보다 심장이 전혀 뛰지 않았다. 의사는 "엄마 탓이 아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귀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근무시간이었지만 도저히 일을 더 해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엉엉 울며 자리로 돌아오는데 직장 동료들이 무슨 상황인지 몰랐을 리가 없다. 친한 동료 한 명은 바로 유산임을 감지하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 길로 짐을 챙겨 회사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슬픈 소식을 전해 들은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숨이 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마음 착한 남편은 같이 울면서도 내 위로를 멈추지 않았다. 본인도 정말 많이 속상했을 건데, 내 마음이 더 아플 것이기 때문에 나를 먼저 헤아려준 것이다. 둘 다 운전을 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차에서 한참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이 와중에도 이 소식을 어떻게 주변인들에게 전하나라는 걱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뛸 듯이 기뻐하던 친정 부모님과 시댁 식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현실적인 문제도 마음에 걸렸다. 엉엉 울면서 동시에 회사 담당 매니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너무 미안하지만 유산이 확정되어 도저히 일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못되므로 현재 집으로 향한다는 이야기였다. 매니저는 바로 위로의 이메일을 건네 오며,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었다.


집에 와서도 한동안 멍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2020년 7월 유산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6개월 만에 일어난 또 다른 유산이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왜 나는 또다시 아파야 하는지, 왜 남들에게는 너무 쉬운 그 임신이 내게는 이렇게 어려워야만 하는지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첫 유산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몰랐으니까, 내가 바보같이 내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임신을 일찍 알았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아이를 지키고자 했는데도 유산이 되었다. 차라리 임신인 줄 몰랐다가 아이를 잃었던 첫 유산이 오히려 나았던 것 같았다. 무려 6주간 나는 이미 엄마로 살았는데, 한순간에 엄마가 아니게 되었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담당 가정의 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담당 패밀리 닥터는 부재중이라 동료 의사가 전화를 주었다. 그녀는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향후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를 설명해주었다. 아이를 자연 배출했던 첫 번째 유산과 달리, 이번 유산은 아이가 아직 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의사는 세 가지 옵션을 제안해주었다. 첫째는 첫 번째 유산처럼 기다렸다가 자연배출을 하는 것이었다. 자연배출이 된다고 하더라도 100% 나왔는지를 확인하려면 또다시 초음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는 약으로 배출시키는 방법이었다. 역시 100% 깔끔하게 배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두 배출방법은 시간이 꽤 걸렸다. 자연배출은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릴 거라고 했고, 약물 배출 또한 몇 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제안받은 것은 소파술이었다. 영어로는 D&C라고 불렀다. 의사가 직접 자궁 내에 기구를 넣어 아이를 꺼내는 시술로, 한국에서는 시술이지만 캐나다에서는 수술에 해당되었다. 이 수술의 단점은 어쨌든 수술이므로 유착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의 단점은, 낙태가 가능한 캐나다 특성상, 그곳에 유산한 엄마들 뿐 아니라 낙태를 위한 여성들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와 신랑은 소파술을 선택했다. 하루라도 빨리 다시 자궁을 정상으로 만들어야 다시 임신을 시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일주일 뒤 소파술 날짜를 잡고, 우리는 또다시 여행을 떠났다. 지난 유산 때도 그랬지만, 이번 유산도 역시 마음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급하게 가는 여행이라 가까운 캘거리로 떠났는데, 지금에 와서 사진을 돌려보면 얼굴이 영 좋지 못했다. 캘거리는 마이크로 브루어리로 유명해서, 6주간 참고 있던 맥주도 시원히 마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추운 듯 따듯한 시기였지만 몸보다 마음이 몹시 추웠다.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지만 울고 있었다. 지금 봐도 그게 표정에 드러난다. 몸의 상처에는 굳은살이 배기지만, 마음의 상처에는 굳은살이 배기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는 더 오래가고, 새로운 사랑으로만 고칠 수 있다. 우리 커플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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