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어머니는 방과 후에 나와 동생을 근처 어린이 도서관으로 자주 데려가셨다. 어머니는 우리가 만화책 읽는 데에 꽤나 엄격하셨는데, 반대로 나와 동생은 만화책 읽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어린이/청소년으로 자라났다. 특히 나는 중고교 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책과 공책에 만화 그리기를 즐기며 급기야 방과 후 활동은 만화부를 할 정도로 만화를 좋아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웹툰을 즐겨 읽는다. 사설이 길었다. 요는 어머니는 만화책이 싫다고 하셨는데, 그랬던 어머니가 유일하게 읽어도 좋다고 허락했던 만화책이 두 개가 있었다. 바로 "데굴데굴 세계여행"과 "먼 나라 이웃나라"였다. 내 동생은 유럽의 문화와 역사에 초점을 맞춘 "먼 나라 이웃나라"를 좋아했고, 나는 그런 유럽을 여행하고 탐험하는 "데굴데굴 세계여행"을 훨씬 좋아했다. 어쩌면 나는 해외에서 살 운명이었던 것이다.
어릴 때 꽤나 가난했던 우리는, 어머니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 다행히 각종 공부를 어머니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만 해도 영어는 초등학교 과정에 들어있지 않았다. 중학교에나 들어가야 ABC를 가르쳤지만, 물론 대부분의 초등학생들이 미리미리 영어를 배워두곤 했었다. 나는 당시 초등학교 동창 친구가 듣던 윤선생 파닉스와, 친할머니께서 어디서 구해주셨는지 알 수 없는 해적판 디즈니 비디오테이프를 갖고 어머니와 함께 영어공부를 시작했는데, 윤선생 파닉스와 어머니의 영어로는 해적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그 점이 매우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와중에 사촌 언니 오빠가 라이언킹에 나온 Circle of Life라는 노래를 멋들어지게 영어로 부를 줄 아는 게 아닌가!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도 본격적으로 영어가 배우고 싶었다. 난생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영어학원을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나를 무려 영국문화원에 딸린 어학당에 넣어주셨는데, 그때가 이미 초등학교 5~6학년 때였다. 영어를 본격적으로 배운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어 초등학교 1~2학년과 동시에 시작했지만 내 열정과 빠른 흡수력으로 나는 곧 월반을 해서 해가 지나기 전에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던 나는 영국문화원을 졸업하기에 이른다.
오히려 중학교에 들어가서 문법을 배우면서 영어에 대한 흥미는 떨어지긴 했지만 (캐나다에서 10년을 살고 있는 지금도 종종 몇몇 문법은 틀린 채로 입에 붙어 남편이 종종 고쳐주곤 한다) 말하고 듣는 분야에 대해서는 흥미가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만 갔다. 그런 내가 대학을 영문과를 선택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내가 완전히 몰랐던 것이 하나 있는데, 영어영문과는 영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영어"문학"을 배운다는 점이었다. 내 대학성적은 그래서 처참했다. 하하. 셰익스피어의 고대 영어는 도저히 재밌지가 않았다.
하지만 대학 4년간, 나는 미국 캠프 카운슬러 프로그램을 따라가고, 미국 횡단 여행을 했고, 유럽을 80일간 여행했다. 2005~2006년 사이에 있었던 이때의 기억을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캠핑카를 타고 미국과 유럽여행을 다시 한번 하는 게 평생 목표일 정도로 나는 그 기간을 그리워한다. 돈이 없어 피자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마음은 가장 충만했던 시기였다.
이렇게나 여행을 좋아하던 나였지만, 첫 직장이자 한국에서의 마지막 직장은 유명 게임회사였다. 마케팅팀으로 입사해서 어쩌다가 총무팀으로 옮겨서 일을 했는데, 나는 내게 그런 서비스 정신이 있는지 총무팀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회사는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즐거웠는데, 4년 차쯤 되고 나서 약간의 회의감이 나를 찾아들기 시작했다. 당시 내 한국 나이 29, 서른을 목전에 두고 과연 이대로 계속 회사생활을 하는 것만이 맞는 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회사가 강남에서 판교로 멀리 이사 간 것도 크리티컬 했다. 이미 왕복 두 시간을 출퇴근 시간에 쏟아왔는데 판교로 옮긴 후 (당시의 판교는 허허벌판이어서 지금처럼 좋지가 않았다) 출퇴근 시간이 1.5~2배 이상으로 늘었던 것도 너무 힘들었다. 무언가 결정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팀장님과 상담을 했다.
그때 팀장님과 했던 대화는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내가 누가 봐도 회사생활에 흥미를 잃어가자 팀장님이 나를 붙들고 "곧 대리 달건데, 그걸 바라보고서라도 일을 열심히 해야지"라고 독려해주셨다. 나는 "대리 달고나 면요? 과장 달고 그러는 건가요? 약간 회사생활에 회의가 오는 것 같아요" 그런 나를 보고 팀장님이 해주신 말은 충격에 가까웠는데, 팀장님은 이렇게 대답해주셨다. "아니야. 회사 생활이 굳이 전부가 될 필요는 없긴 하지. 하지만 그것이 미래의 너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쳐야 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해. 내 꿈은 언젠가 퇴사해서 젊은 친구들을 위한 펍을 오픈하는 거야. 회사생활에 지친 젊은이들이 와서 '형, 너무 힘들어요' 하면 내가 '원래 인생이 힘든 거야'라고 대답해줄 수 있는 그런 펍같은거 말이야"라고 대답해주었었다. 도대체 왜 팀장님의 이 말이 나를 회사에 더 머물게 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는지는 11년이 지난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오히려 팀장님의 이 말 때문에 나는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팀장님이 말하는 회사 이후의 내 삶을 꿈꾸고 싶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당시에 회사에 비밀로 하고 몰래 진행하고 있던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에 합격하게 된다. 지금이야 워킹홀리데이 자격이 많이 바뀌었지만 2011년 당시만 해도, 우편으로 신청서를 보내면 랜덤으로 선택되어 신청서류 중 일부만 합격을 시키는 정말 말도 안 되고 기묘한 방법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받곤 했는데 (심지어 비자가 나오면 6개월인가 1년 안에 무조건 출국을 했어야 했다) 나는 이것이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후다닥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워킹홀리데이 준비를 했다. 그렇게 만 28살 생일을 치르고 다음날, 나는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년간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익히고, 많은 것이 달라져서 한국에 올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그 1년이 평생이 될 것이라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