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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위시 Sep 27. 2022

당신의 나팔관은 안녕하십니까

세 번의 나팔관 조영술, 잊지 못할 아픈 기억

결국 자연스럽게 배란 유도를 통해서 자연임신을 시도해보려던 난임 의사와 우리 커플의 노력은 끝내 시간낭비로 끝나고 말았다. 몇 개월이 지나 의사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이미 서른두 살이었고 의사는 그렇다면 본격적인 난임의 준비과정에 들어가자고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난임 여성의 육체적 고통이 시작된다.


끽해봐야 부부관계가 아닌, 자위를 통한 정액을 받아 제출해야 한다는 수치심 정도가 최악의 상황인 남편들과 달리, 각종 질정 및 약물 복용, 자가주사, 지속적인 배란 테스트 및 임신 테스트해보기 등등 난임에서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불편함과 고통은 길고 다양하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는 개인적으로 최악의 고통이라고 생각되는 "나팔관 조영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난임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을 먹는 여성이라면 모두 한 번은 지나가야 하는 나팔관 조영술은 요즘 한국에서는 무슨 반수면마취도 해준다 하고, 초음파로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생겨서 내가 받았던 2016년, 2018년과는 아마 확연히 다른 걸로 알고 있다. 다들 벌벌 떤 것에 비해 생각보다는 참을만했다는 반응들을 들을 때마다 "세상 참 좋아졌구나"라고 비스듬히 내 고통스러웠던 세 번의 기억을 반추하게 되는 것이다.


나팔관 조영술과 나는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남들은 한 번만에 결과를 잘도 받는다는데 나는 무려 세 번이나 그 고통을 느껴야 했다. 캐나다는 웬만한 아픔에는 절대로 마취를 해주지 않기에 타이레놀을 미리 먹고 가서 자궁경부를 사람의 힘으로 열고 가느다란 관을 집어넣어 엑스레이로 그 길이 막혔는지 열렸는지 알아보는 무식한 옛날 방식으로 말이다. 내가 사는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나팔과 조영술을 해주는 곳은 단 한 군데뿐이다. 적어도 내가 받을 땐 그랬다. 로열 알렉산드라 병원의 로이스 홀 여성병원이 그곳이었는데, 생리가 시작되는 날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하고, 날짜와 시간을 맞추어 무조건 그 날짜와 시간에 방문해야 했다. 아무리 캐나다가 휴가에 관대하다고 해도, 예약 날과 진료 날이 2일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급하게 휴가를 요청해야 했기에 직장에 살짝 눈치가 보였다.


많이 아플 테니 미리 타이레놀을 먹고 와라 라는 경고를 들었는데, 나는 왜 한알밖에 먹지 않았을까. 당시만 해도 나는 약을 많이 먹으면 몸에 정말 안 좋다는 이상한 신념이 있었다. 적어도 두 개는 먹었었다면 내가 느꼈던 고통의 강도가 달랐으려나. 하하. 병원에 도착하고 가운을 입고 다른 여성들과 함께 서로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대기하다가, 간호사의 부름을 받고 들어갔던 시술실을 아마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무슨 수술실처럼 차가운 시술대에 올라앉아 밑에 패드 한 장만 깔고 그 위에 눕자, 한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가운은 뒤쪽이 열려있어 내 하반신은 적나라하게 오픈되었고, 심지어 생리 중에 하는 시술이기 때문에 더더욱 부끄러웠다. 지금이야 굴욕 의자든 질초음파든 부끄러움 없이 받는 나지만, 그 당시엔 그 자세부터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리고 문제의 의사가 들어왔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 힘빼"라고 나이가 지긋한 여의사가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내 허벅지를 밀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옆에서 상냥한 간호사가 "아프긴 한데, 1~2분 내로 빨리 끝나요. 무서우면 내 손을 잡아요"라고 손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따뜻한 손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팔관 조영술의 시작은 쇠로 된 (아님 알루미늄이려나, 뭐든 그게 거대하고 차가웠고, 날카로웠다는 게 중요하다) 포셉으로 질 입구를 열어놓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뜻하게 좀 준비해줬으면 그렇게 아프진 않았으려나, 질 입구가 열리는 것부터가 나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그때부터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는데, 의사는 계속 "다리에 힘 빼라" 고만했다. 도저히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닌데... 그렇게 질이 열리자, 가느다란 관을 또 자궁입구를 열어서 집어넣어야 했다. 이 부분이 문제였다. 의사는 무슨 가위 같은 것을 저 깊숙한 내 자궁입구 근처에 넣어 그걸 열어본다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는데 정말 비명이 절로 나왔다. "아이씨, 이게 왜 안 열리지"라는 의사의 불평과 "괜찮아요, 거의 되어가요"라는 간호사의 걱정 어린 응원이 내 신음소리를 비집고 들려왔다. 1~2분이면 된다던 조영술은 1만 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잠시 후


"안 되겠다. 안 열려"라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의사는 내 질 안에 넣었던 각종 기구를 빼내며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질 입구가 너무 단단하게 막혔어. 이대로 하면 상처만 나고 나팔관 조영술 못해요. 내가 처방약 줄테니까 다음에 그거 넣고 다시 시도하자고"라는 말만 남기고 의사는 바로 방을 떠났다. 간호사가 "많이 아팠죠?" 하며 생리대를 하나 건네주었다. "저쪽에서 탈의하시고 밖에서 기다리면 다음번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른 간호사가 알려줄 거예요 "라고 나가는 길을 안내해주었다. 건네받은 휴지로 아래를 닦아보니 의사가 얼마나 열심히 이리 벌리고 저리 벌렸는지 아래에 피가 흥건했다. 그렇게 내 첫 나팔관 조영술은 실패로 끝났다.


그렇게 두어 달을 또 흘려보내고,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내 자궁입구가 너무 단단하게 닫혀있던 것이 문제였기 때문에, 의사는 이번에 미리 자기 전에 질정을 처방해 줄 테니 그걸 넣고 자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도분만제였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자궁을 일부러 열어주는 그 유도분만제 말이다! 그럼 그런 거라고 설명을 좀 해줄 것이지 야박한 사람들이 나에게 전혀 경고를 해주지 않아서 나는 밤새 타이레놀을 먹고 또 먹으며 끙끙 앓고야 말았다. 가뜩이나 생리 중인데, 거기에 가진통까지 일부러 겪게 한 셈이니 얼마나 아프던지. 그때 나는 이미 생리통이 이미 강력해져 있을 때였는데, 가진통은 세상 또 다른 고통이었다. 밤새 끙끙 앓고 나서 계속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으며 무서웠던 그곳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첫 번째와 같은 방법,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괴롭고, 여전히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훨씬 더 상냥한 의사 선생님이 담당이어서, 혹은 이미 가진통 약으로 고통을 받고 있어서였는지 나팔관 조영술 자체는 신음소리 몇 번과 함께 정말 1~2분 만에 끝났다.


"둘 다 잘 뚫려있나요?"라고 또다시 피를 닦으며 물었는데, 상냥한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생각보다 밝지가 않았다. 한참을 스크린을 보더니, "이게 100% 확실하진 않지만, 한쪽으로 약이 좀 덜 들어간 건지, 아니면 막힌 건지 잘 알 수가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청천벽력 같았다. 막힌 건 막힌 것대로 문제지만, 약이 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의사는 "그래도 한쪽은 확실히 잘 뚫려있으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네요"라고 웃으며 대답해주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탈의를 마치고, 환자 대기실로 나와 그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펑펑 울고야 말았다. 그 고생을 한 내가 너무 불쌍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한쪽이 진짜 막혔는지 안 막혔는지도 모르겠다는 의사의 애매한 말에도 너무나 화가 치솟았다. 정말 남들이 보던 말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를 내어 엉엉 울고야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서러운 경험이었다.


두 번의 나팔관 조영술이 모두 반쪽의 성공으로 끝나고 나자, 난임 의사는 어쨌든 한쪽은 열렸으니, 거기에 배란이 되는지 잘 보고, 그쪽에서 배란이 되는 경우 인공수정을 시도해보자고 제안을 주었고, 그 이후 우리는 두어 번의 인공수정을 시도했다. 인공수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에피소드에 자세히 적을 예정이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착상이나 임신테스트기 두 줄이라는 좋은 소식 한번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그렇게 세 번째의 인공수정을 준비하려던 우리에게 난임 의사가 건네준 이야기는 내게 또 기다림을 안겨주었다. 에드먼턴에 사설 난임 병원이 생겼으며, 자신이 그곳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설로 넘어가면 당연히 공공기관에서 받던 것보다 가격도 올라가고, 각종 무료 시술도  돈을 내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사 선생님은 그곳이 오픈하기 전에 다시 한번 나팔관 조영술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세 번째 나팔관 조영술이었다. 한쪽이 막혀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니, 아직 정부에서 공짜로 나팔관 조영술을 해줄 때 받아보라는 권유였다.


솔직히 정말 정말 정말 받기 싫었다. 그 고생을 또 하라고????


그렇지만, 난임은 결국 확률의 문제고, 만약 이번에 해서 두 나팔관이 다 열려있다면 나는 인공수정 확률이 올라가는 것이므로 동의를 하고, 나는 세 번째 나팔관 조영술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기가 차다. 다시 한번 유도분만제를 넣고, 타이레놀과 밤새 친구가 되어 끙끙대며 아픈 배를 부여잡고, 차가운 시술대에 누워 이번에는 제법 덤덤하게 신음소리를 내고 세 번째 나팔관 조영술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세 번의 나팔관 조영술이 모두 앨버타 헬스 서비스에서 지원해주어 공짜로 받았다는 사실과, 마지막 나팔관 조영술 결과, 막혔는지, 약이 덜 들어간 거였는지 알 수 없던 두 번째 시술의 결과는 "약이 덜 들어간 것"으로 내 나팔관은 양쪽 다 건강히 열려있다는 결과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해도 진짜 지루하고, 길고, 고통스럽고, 다사다난했던 내 나팔관 조영술, 어쨌든 결과 자체는 해피엔딩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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