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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 Jan 16. 2023

건망증은 사랑을 싣고

"삐삐삐 삐삐삐삐"

비밀번호를 누르면 "띠리리"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열쇠가 없어도 비밀번호만 누르면 문이 열리는 편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이천에서 자취하던 집은 비번으로 여는 첨단 시스템이 아니라 열쇠로 열어야 하는 원룸이었다.

 출근할 때 얼른 문을 잠그고 나가야 하는데, 도무지 열쇠를 어디에 둔 지 기억이 안 나서 코딱지만 한 원룸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니기 일쑤.

출처 - 바람피면 죽는다


 핑크색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고 출근하던 그날도 겨우 이불 밑에 둔 열쇠를 찾아 부리나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뭐 하나를 챙기면 왜 늘 다른 걸 놓치는 걸까? 20분에 한 대씩 오는 버스라 지각 안 하려면 24분 버스를 꼭 타야 하는데, 지갑이 없다.


 다시 집에 가서 지갑을 챙겨 오면 100% 지각.


 급한 대로 편의점에 들어가 부탁을 했다.


"저기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지갑을 두고 와서요. 이 시계 맡겨두고 이따 퇴근해서 찾으러 올게요. 차비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19번 버스 24분에 오는 걸 못 타면 지각이라. 좀 도와주세요."

내가 이리 얼굴 두꺼운 여인네였나? 창피고 뭐고, 지각만 면하자.


"매일 여기서 버스 타시는 것 같던데, 시계는 됐고요. 차비 빌려드릴게요. 얼른 버스 타고 가세요. 돈은 내일 주셔도 괜찮아요."


 친절한 편의점 알바생 덕분에 늦지 않고 출근을 했다. 퇴근길엔 동료 선생님이 카플을 해주셔서 집 앞에 내려 지갑을 챙겨 나왔다.

 편의점에 가 보니 다른 사람이다. 오전 타임만 하나?

 바나나 우유 2개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봉투에 어제 빌린 버스비를 넣고 감사했다는 짧은 인사를 적었다.


 다음날 평소보다 좀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저 어젠 감사했어요."

 바나나 우유와 봉투를 건넨다.

"아니에요. 큰 도움드린 것도 아닌데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네. 덕분에 지각 안 하고 출근 잘했어요."

"저, 혹시 토요일에 시간 되세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 알바생을 제대로 쳐다본다.


"바나나 우유 사주셔서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리려고요."

"그건, 제가 어제 감사해서 그런 거라 부담 갖지 마세요."

"사실 바나나 우유는 핑계고요. 그냥 커피 한 잔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요."

"......"

"부담되시면, 내일 아침에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 사드릴게요."

 쑥스러운 듯 웃는 그가 왠지 귀엽다.

"감사해요. 지금은 버스 올 시간 다 돼서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 내일 봬요."


 그가 커피를 사고

 다음 날 내가 초콜릿을 건넸다.

 다음 날은 그가 사탕을,

 그다음 날은 내가 소시지를.


 본의 아니게 아침마다 편의점 출근 도장을 찍게 되었다.

 오고 가는 간식 속에 웃음이 스몄고, 편안함이 채워졌다.


주말 약속을 잡고 편의점이 아닌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웃을 때 눈꼬리가 내려가 멍뭉이처럼 순해 보이는 그에게서 나는 은은한 시트러스 향.

 연한 카키색 니트가 참 잘 어울렸던 그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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