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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May 04. 2024

<농촌에서 살아보기 퇴고 글>나의 아지트, '취중천국'

- '농촌에서 살아보기'과정에 대한 스물 세번째 글

  오랜만에 ‘취중천국’을 찾았다. 내가 담근 엄나무 잎 장아찌와 텃밭에서 수확한 야채들을 가지고 갔다. 이것들을 받아든 여사장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회사를 경영하던 사람이, 불쑥 시골 텃밭에서 키운 야채들을 들고 왔으니 놀랄 만도 하다. 도시에서 오랫동안 회사를 다녔던 사람이 갑자기 농부가 되겠다고 하니, 이해가 안되었을 것이다. 

  2022년 6월 중순에 5년이상 살아왔던 인천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며칠 앞둔 어느 토요일이었다. 아내, 둘째 아들 찬수와 함께, 수년 동안 즐겨 찾았던 실내 포장마차인 취중천국에 갔다. 이곳은 인천 연수구의 한적한 뒷골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라남도 벌교가 고향인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자그마한 식당이었다. 

  벌교 꼬막, 문어, 전복 등 남해안에서 나오는 다양한 해산물로 만드는 안주는, 어느 일류 식당에서 나오는 요리보다 맛있었다. 바로 전날 직송해온 해산물로 요리를 하기 때문에, 싱싱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서울의 맛있다고 알려진 음식점은 다 찾아가본 미식가 친구와 함께 그곳을 찾았다. 그 친구가 여사장님의 요리를 먹어보고 평가한 말이 기억난다. 

  “서울의 유명 요리점을 많이 가봤지만, 이곳만큼 전라남도에서 나오는 해산물을 맛있게 하는 곳은 없었어.” 

  나는 해산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포장마차와 같은 이곳의 분위기가 더 좋았다. 테이블이 불과 5개정도인 작은 식당이어서, 처음 보는 옆자리 손님들과 스스럼없이 소주 한잔을 나누기도 했다. 벽면에는 단골들의 사진이며 사인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시골의 식당처럼 별다르게 꾸민 것없이, 수수한 곳이었다. 나는 동료들과 술을 마실 때면, 항상 이곳을 찾았다. 허름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으로 이사한 후 취중천국에 드나들기 시작했으니, 이 곳을 안 지 벌써 5년이 훌쩍 지나갔다. 사장님 부부는 내가 회사에서 경험한 희로애락을 거의 모두 알고 있었다. 취중천국의 벽에는 내가 회사 동료들과 찍은 사진들과 나의 사인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어떤 것은 5년이 지나면서 낡아 버렸다. 사진들을 들여다볼 때면, 기쁘거나 힘들었던 당시가 생각나곤 했다. 이렇게 그 식당은 나의 인천 생활 5년의 추억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서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쉽게 찾아오기 힘든 식당이 되고 말았다. 같이 소주 한 잔씩을 기울이면서 맛있는 남도 음식을 해주시던 사장님 부부와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나에게는 인생의 한 귀퉁이를 담아냈던 장소였기에 많이 아쉬웠다.


  2021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제2의 삶을 준비하면서, 나는 그 동안 만났던 사람들과 이별하는 과정이 힘들었다.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에서 업무관계로 만났던 사람들과는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까, 대부분의 회사 사람들과는 순식간에 연락이 끊어졌다. 공적인 업무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는 공적인 업무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의 공허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취중천국 사장님 부부와의 이별은 회사 동료들과의 헤어짐 보다 더 가슴 찐하게 다가왔다. 나와의 추억이 많았던 분들이라서 그런가? 어느 순간 다가온 이별이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하겠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과거의 인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기억나네요. 회사의 부서장들과 회식을 하는 날이었죠.”

  사장님 부부는 야구를 무척 좋아하였다. 내가 몸담았던 야구팀이 경기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tv 중계방송을 틀어 놓곤 하였다. 자연스럽게 야구를 좋아하는 손님들이 많았다. 우리 회사의 부서장들도 내가 오기전부터 이미 취중천국의 단골이었다. 

  처음 그 식당에서 회식을 하는 날에는 다른 손님을 받지 않았다. 같이 온 부서장들의 숫자가 많기도 하였지만, 새로 부임해온 나와 부서장들의 시간을 온전히 만들어 주기 위한 사장님의 배려였다. 여사장님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동안, 남편인 사장님은 우리들의 사진을 여러 번 촬영하였다. 빈 종이에 사인도 요청했다. 사장님은 손님들의 사진과 사인으로 식당 벽면을 빼곡히 채워 놓았다. 손님들에게는 추억의 전시관이었다. 

  야구팀이 우승한 후 동료들과 자축하는 파티도 이곳에서 열렸다. 그때도 우리들이 온전히 전체 공간을 차지해서,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취했었다. 팀이 연패에 빠져서 힘들었을 때도, 시합이 끝난 직후에 그곳에 있었다. 같이 온 몇몇 동료들과 조용히 술만 마셨다. 어느 날인가는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인천 경찰청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도 야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런 저런 야구 이야기가 오고 갔었다. 


  사장님 부부와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면서 지나간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까, 밤이 꽤 깊어졌다. 우리가 집으로 가려고 일어서자, 여사장님은 못내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자주 보기가 어렵겠네요. 횡성에서 터전을 잘 닦아 놓으세요. 우리도 곧 합류할께요.”

  사장님 부부도 식당을 그만두고 언젠가는 충청도나 강원도의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한단다. 번잡한 도시생활이 벅찬 나이가 된 것이다. 나는 가능하면 강원도로 이사 오라고 권했다. 여사장님의 전라남도 음식 맛을 계속 느끼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아니 인연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내 욕망에서 나온 권유였다.

  여사장님은 인사말과 함께 이것 저것을 바라바리 싸주었다. 맛있는 김치찌개를 한 솥 끓여 주었다. 아내가 취중천국에서 끓인 김치찌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집으로 가져갔던 젓갈로 담은 양념장도 큰 그릇에 가득 담아주었다. 고향에 갈 때마다 이것 저것 몽땅 싸주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졌다. 자주 얼굴 보기 어렵다는 아쉬움을 진하게 느끼면서, 사장님 부부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인생에서 헤어짐은 언제나 새로운 만남으로 채워지곤 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과거의 자국들이 옅어지게 된다. 연인들이 헤어진 후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과거의 추억이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 삶의 스토리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나의 성장하는 모습도 그려지게 될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 매달려 사는 시간보다는 새로운 만남을 만들어가는 시간으로 채워나가야 하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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