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 2년차에 경험한 열번째 이야기
여름철 낮 시간이 길어지면서, 일출 시간도 빨라졌다. 이 시기에 나는 보통 새벽 4시쯤 일어난다. 부지런히 아침 식사를 하고, 20분정도 떨어진 삽교리의 내 농장으로 향한다. 작물들은 해가 뜨고 1시간 30분쯤 후부터면 광합성을 활발하게 하기 시작한다. 오전 11시정도까지 자신이 필요한 에너지를 충분히 만들어 내기 위해서, 열심히 공장을 가동한다. 이 시간대에 작물이 일할 수 있도록, 물과 필요한 영양소를 미리 공급해주어야 한다.
2024년 8월 어느 날도 무척 더운 날이라고 예보되었다. 동쪽하늘에서 빨갛게 떠오르는 해가 자동차의 앞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다. 햇빛 가리개를 펼쳤지만, 덮쳐오는 햇빛을 피해 실눈을 뜨고 운전해야만 했다. 밭으로 향하는 내 머리속에는 온통 그날 할 일들이 그려졌다. 토마토에 종합 액비와 함께 물 4톤정도 관주해주고, 고추에는 병충해 예방제를 살포하고, 토마토의 곁순을 제거해주고… 해야만 하는 일이 끝도 없었다.
‘오늘 하루만에 다하기는 어렵겠네. 이중 토마토 관주와 고추의 병충해약 살포는 꼭 하고, 나머지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작업해야지.’
나 혼자 농장을 꾸려가다 보니까, 매일 매일 시간에 쫓겨 다녀야만 했다. 때로는 힘이 부쳐서 더 이상의 작업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농장으로 출근하고, 저녁에는 해가 뉘엇 뉘엇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퇴근하곤 했다. 녹초가 되어서 돌아온 나는 씻고 잠깐 소파에서 tv를 보면서 쉰다. 30~40분쯤 지났을 까. 어느 덧 소파에서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렇게 9시가 넘어서면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나의 일상생활에서 회사 다닐 때의 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업무가 많이 밀린 날, 회사 일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내가 인생 2막을 만들어가면서 원하던 삶을 살고 있는 건가?’
바쁜 날들이 이어지면서, 내 머릿속에 제일 많이 떠오른 질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난 겨울 수업시간에 멘토인 박선생님이 한 말이 겹쳐졌다.
“농업도 경영자가 되려고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농업 노동자에 머물고 말아요.”
박선생님은 농업의 부가가치를 올리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하루 하루 작물을 재배하는 데 매몰되어 버리면, 작물들의 life cycle에 따라 농부의 시간도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는 수확때가 되면,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에 따라서 그 해 수입의 높고 낮음이 결정된다. 농작물 가격이 높을 때는 기분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일년내내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농사를 짓는 것이 맞는 지에 대한 자괴감이 들곤 한다. 그래서 농작물 재배에만 몰두하지 말고, 이것들을 통해서 어떻게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을 지를 꾸준히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 이야기였다.
‘나의 삶을 경영하는 농민인가? 아니면 그저 농업 노동에만 매몰된 농민인가?’
애초에 농사 일은 나에게 제2의 삶을 살아가는 나날을 꾸미는 여러가지 일중의 하나였다. 물론 하루중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중요한 일이다. 작물이 무럭 무럭 자라는 모습에서 기쁨을 느끼고, 소비자들이 건강하게 먹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끼고 싶었다. 제2의 삶을 생산적인 모습으로 만들고 싶은 나의 욕구를 채워주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농사만으로 나의 24시간을 꾸미기는 싫었다. 내가 젊지 않기 때문이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운동도 하고, 색소폰도 연습하고… 특히 새로 정착한 횡성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기회도 가지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꿈이었을 뿐인가? 농번기가 시작된 순간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가 질때까지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하루 종일 힘들게 육체노동을 했기에,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전혀 내가 그리던 하루 일과가 아니었다.
“나는 half-day farmer를 꿈꾸고 있어요. 적어도 가장 바쁜 5월 한달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기에는 그 꿈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농촌에서 살아보기’ 후배들과의 미팅자리에서 했던 말이다. 그런데 사실상 귀농 첫해인 2024년에는 4월 하순부터 바빠지기 시작해서 어느 덧 8월 중순에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서 저녁 6시나 7시에 귀가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농번기가 시작되고 네 달이 지나 가는데도 여전히 농사 일말고는 다른 일을 할 염두도 내지 못했다. 덕분에 집앞 정원 텃밭에 심어 놓았던 고추며 브로컬리가 제대로 크지 못하였다. 텃밭에 정성을 쏟을 에너지가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내년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half-day farmer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까?’라는 질문이 맴돌고 있었다. 일단 나와 같이 일할 동료를 구해서, 나의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다. 노동의 과부하가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농사에서 즐거움을 느낄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동료와 함께 부가가치가 높은 작물을 심어보고, 그 결과를 측정할 생각이다. 아열대 기후로 변하면서 작물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토마토나 고추 등의 작물만 재배해서는 생산성이나 부가가치가 떨어질 것이 자명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즐거움도 같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차츰 비닐하우스 시설을 확대할 계획이다. 내 밭의 절반이상이 노지인데, 노지 재배는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내년에는 미니하우스를 한 동 지어서, 새로운 작물을 심어볼 생각이다.
귀농 첫해에는 작물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지 못하고 정신없이 지나갔다. 거기에다가 새로 농장을 꾸미면서 배수로를 파거나 부서진 시설을 보수하는 등 농사이외의 노동이 너무 많았다. 특히 폭우로 인해 블록담이 무너지면서 노동의 부담이 더 커졌다.
내년에는 좀 더 농작물의 재배에 집중하면서, 나만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노동에 매몰된 농민이 아니라 적절한 수준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생산성있는 시간을 가진 농업 경영자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