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촌에서 살아보기'과정에 대한 스물 아홉번째 글
“밭 3천평만 있으면, 전화만으로도 농사지을 수 있어요.”
김대표님이 나와 동료들에게 농담조로 한 이야기였다. 우리들이 산채마을의 송사장 밭 2천평에 옥수수 정식을 막 끝냈을 때였다. 정식은 이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나와 동료들은 땀을 많이 흘린 탓에, 거의 탈진 상태였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김대표님이 진담 반, 농담 반의 말을 건넨 것이다.
“요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으니까, 전화 한 통화로 무슨 일을 할 지만 알려주면 알아서 작업을 해줘요.”
사람을 써야할 만큼 충분히 큰 면적이 되면, 인건비를 빼고도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의미였다. 김대표님은 만평이 넘는 큰 밭에 감자농사를 짓고 있었다. 씨감자 정식작업부터 농약뿌리기 등의 관리작업과 수확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시기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활용하고 있다. 정작 김대표님은 트랙터로 로터리를 치거나 판로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육체노동이 거의 없는 농부였다.
나와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에 참가한 동료들이 송사장 밭에 견학을 간 것은 2022년 6월 중순이었다. 방울토마토를 정식한지 한 달쯤 지난 시점이라 얼마나 컸는지 궁금했다. 송사장 밭에 도착했을 때는 뙤약볕이 한참 내려 쬐는 오후였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송사장 부부와 젊은 태국인 부부, 그리고 70대 노모가 함께 브로컬리를 수확하고 있었다. 방울토마토 대신 브로컬리 수확하는 방법을 송사장에게 배웠다. (방울토마토는 개별적으로 하우스를 방문하여 살펴보았다.) 이때 같이 수확하고 있던 송사장의 노모가 다가왔다.
전달에 이미 인사를 한 사이여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면서 옥수수 정식을 해야 하는데, 일손이 없어 큰일이라면서 걱정을 했다. 이번 주에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모가 커버렸다는 것이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옥수수 정식 작업을 하기로 약속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6시 30분부터 정식작업을 진행하였다. 총 세군데로 나눠진 밭에 옥수수를 심었다. 이미 양상추를 수확한 밭에 이모작으로 옥수수를 재배할 요량이었다. 첫번째로 진행된 밭은 양상추를 수확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양상추 잔해물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멀칭 비닐들이 대부분 처음 설치한 모습 그대로였다. 옥수수 정식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밭에서 정식작업을 예상보다 빠르게 마무리한 우리는, 기분 좋게 두 번째 밭으로 향했다. 그런데 두 번째 밭은 첫 번째 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업환경이 열악하였다. 산 꼭대기 바로 밑에 위치해 있어서, 밭의 경사도가 심했다. 보습력이 떨어지는 땅이어서, 흙이 딱딱해져 있었다. 옥수수를 정식하는 도구가 흙 속으로 파고 들기가 어려웠다. 모종을 심을 수 있을 정도로 땅에 구멍을 내기 위해서는, 정식 도구로 한참 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밭과 달리, 말라 비틀어진 양상추가 이곳 저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자칫 양상추가 발에 걸려서,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밭의 작업환경이 좋지 않아서, 우리의 작업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마침 첫 번째 밭 작업할 때에 나오지 못했던 교장선생님과 장미씨가 합류하면서,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나는 오랜 만에 장미씨와 한 조가 되어서, 작업을 진행했다.
장미씨는 몸이 약한 편이라서, 농사 일을 힘들어했다. 작업속도가 다른 동료들에 비해서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는 작업 속도가 빠른 교장선생님 형수님과 작업을 해서 힘들었는데, 장미씨와의 작업은 수월했다. 장미씨와 이런 저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한 탓에,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두 번째 밭의 작업을 빨리 끝내고, 석문리에 있는 세 번째 밭 작업을 마무리해야 했다. 모두들 그 전날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상태여서, 작업을 빨리 진행하기 어려웠다. 당초 오전중에 작업을 다 끝마치려고 했는데, 그 날 오후까지 이어졌다.
점심 무렵 송사장이 둔내면의 한 중국집에서 자장면, 짬뽕, 볶음밥 등을 사왔다. 우리들은 밭 바로 옆의 포장도로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각자 주문한 것을 먹기 시작했다. 모두들 배가 고팠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먹기만 했다. 평상시 제일 쾌활한 장미씨도, 말 한마디 않고 밥만 먹었다. 동료들이 식후에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장미씨가 돗자리 위에 벌렁 누워 버렸다. 더 이상 힘들어서 일을 못하겠다는 듯이. 설상가상으로 오후 작업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되지 않아서 비까지 내렸다. 우리는 오후 5시쯤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물론 모두 비에 흠뻑 젖은 채였다.
전화로 하는 농사는 농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농부들의 나이가 점차 많아지면서, 농사를 짓기 어려워지고 있다. 일선에서 은퇴해야 할 나이가 되면, 농사짓던 밭을 임대로 빌려주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밭을 임차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젊은 농부가 그다지 많지 않다. 송사장이 50대 초반이지만 산채마을에서는 가장 젊은 농부이다. 자연스럽게 은퇴하는 농부들이 내놓은 땅을, 송사장과 같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임대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까 송사장은 거의 만평에 가까운 땅에 농사를 짓고 있었다.
넒은 땅에 농사를 지으려면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할 때마다 고용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전화 농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농사의 성공 여부는 결국 싼 인건비이다. 한국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농촌의 현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의 소극적인 이민정책 때문이다. 이것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임금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들이 옥수수 정식을 해주지 않았다면, 송사장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활용했을 것이다. 우리는 교육생이라는 이유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보다 일당을 적게 받았다. 그래서 송사장의 ‘전화 농사’에 외국인 대신 우리를 활용한 것이다.
이틀동안 일을 하면서 ‘전화 농사’에 동원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힘든 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일이 힘든 만큼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건비도 올라갈 수밖에 없기에, ‘전화 농사’의 한계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농업의 한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