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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Dec 21. 2024

<2년차 귀농인의 하루>무릉도원여행기3:역사속의 장가계

- 귀농 2년차에 경험한 열아홉번째 이야기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서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일이라면, 나는 장량(張良)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켜서 백성을 달래고 전방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양식 운반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내가 소하(簫何)만 못하다. 

  100만 대군을 통솔하여 싸우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틀림없이 성을 손에 넣는 일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그러나 내가 이 뛰어난 인재 3인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한나라 유방이 개국공신들을 모아 놓고 낙양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베풀면서 한 말이었다.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5년에 걸쳐서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투다가, 해하의 전투에서 항우를 쳐부수고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이렇게 한나라를 개국하기까지 장량, 소하, 한신은 가장 중요한 공신들이었다. 역사에서는 이 세 사람을 ‘서한삼걸(西漢三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외부의 적들을 모두 제압하고 한나라를 개국하게 되면서, 유방에게 남은 두려운 존재는 오히려 이들 개국공신들이었다. 이들이 그때까지 키워온 영향력을 바탕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방과 그의 왕후인 여후는 공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공신 숙청작업에 대한 서한삼걸의 대응방법이 모두 달랐다는 점이다.

  소하는 전답과 가옥을 살 때면 항상 외딴 벽지에 마련했고, 집을 지을 때 담장을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검소한 삶을 살았고, 전쟁을 하던 유방에게 자식들과 전답을 바치기도 했다. 이렇게 처세술에 능했던 소하는 숙청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반면 실제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초(楚)왕’이라 일컬어지던 한신이 유방의가장 큰 경계 대상이었다. 그는 기원전 196년 한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진희(秦豨)의 반란’에 은밀히 동조하기도 했다. 결국 ‘진희가 패배했다.’는 소하의 거짓 정보에 속아서, 왕궁에 축하하러 왔다가 사로잡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장량은 지혜로운 참모의 대명사인 ‘장자방(張子房)이라고도 불린다. 공신들을 숙청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장량이, 한신에게 같이 현역에서 물러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한신은 장량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한신이 처형된 반면, 장량은 벼슬을 내놓고 무릉도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의 장가계로 내려와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장량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산시성)의 자백산(紫栢山)에서 말년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옛날부터 장가계는 아름다운 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가이드는 장가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려고, 말년에 그곳에서 살았던 장량에 얽힌 역사를 풀어놓았다. 유방과 항우의 싸움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유방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왔던 3인방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까 재미있었다. 특히 한나라를 건국한 후, 이들 3인방의 서로 다른 처세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우리 여행팀은 여행 둘째 날에 원가계에 올랐다. 이곳은 영화 아바타에 나오면서 더욱 유명해진 장소였다. 그날 아침 일찍 여행기간 내내 우리를 실어 날라준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30분쯤 달렸을까? 원가계로 가는 셔틀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15인승 정도 되는 작은 버스였다. 40대로 보이는 여성 운전자는, 올라타는 우리들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할 정도로 한국말을 잘하고 쾌활하였다. 5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그녀가 우리나라의 트로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발음이 틀리지 않는 유창한 솜씨였다. 10분 남짓한 버스타는 시간동안, 손님들은 박수를 치면서 장단을 맞춰주었다. 뜻밖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는 내리면서 감사의 사례를 하기도 했다.

  버스 기사가 준 즐거움 때문인가? 우리가 바라본 원가계의 멋진 풍경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가이드는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오관중 화가가 그림을 그리곤 했다는 장소로 안내하였다. 그곳은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였다. 눈 앞에 수많은 절벽들로 이루어진 산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마치 신선들이 산들 사이로 구름을 타고 날아다닐 것 같은 상상에 빠져들게 했다. 오죽 아름다웠으면 오관중 화가가 그곳을 화폭에 담았을까?

  사실 장가계의 아름다운 모습을 1979년 세상에 알린 건, 화가 오관중(吳冠中)이었다.  그 당시 원가계(遠家界)의 아름다운 절경을 화폭에 담았다고 한다. 그는 과감하게 유화와 수묵화의 한계를 초월해서, 중국의 전통 수묵화와 구별되고 동시에서 서양의 현대 미술과도 다른 점을 보여주는 화풍을 만들어냈다. 그의 그림을 보는 서양인들은 중국의 전통문화 정취를 느끼지만, 반대로 중국인들에게는 서양의 현대 예술의 영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전혀 새로운 화풍과 독특한 표현 기교 등으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프랑스 문예 최고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1992년에는 대영박물관에서 생존하는 중국화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그가 그림을 그렸다는 곳에 앉아 있으려니까, 한번도 보지 못한 그의 그림이 상상되었다.  


  여행을 가면 쇼핑센터를 들리는 것은 기본이다. 우리도 여행 마지막 날에 이불, 베개 등 라텍스 제품과 침향을 파는 곳에 들렀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전혀 지갑을 열지 않았다. 이곳은 가이드의 안내로 간 곳이었던 반면에, 우리 관광팀 중의 한 명이 요청해서 간 곳이 있었다. 바로 연변농협마트였다. 

  라텍스 제품 파는 곳의 인근에 있었는데, 이곳의 참깨를 사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백두산 지역에서 재배되어 온 것으로 품질이 좋다고 한다. 관광객을 위해서 모든 상품이 진공 포장되어,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가져가기 편하게 하기 위한 조치인 것 같았다. 농사를 짓고 있는 나에게는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목이버섯, 노루 궁뎅이 버섯, 송화가루, 쌀, 땅콩 등의 각종 농산물과 고량주 등 중국 술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심심풀이로 먹기 좋은 해바라기 씨를 하나 집어 들었다. 해바라기 씨는 관광지를 이동하는 중간중간에 먹는 간식이 되었다. 


  해바라기 씨를 간식으로 즐겨 먹었던 시간들이 지나가면서, 장가계의 관광도 막을 내렸다. 우리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경이었다. 5일동안 같이 여행을 즐겼던 일행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대전에서 온 4쌍의 부부는 대형 리무진 택시를 예약하였단다. 천안으로 가는 부부는 공항버스를 이용해서 귀가할 계획이었다. 공항에 주차해놓은 차량을 이용해서 귀가하는 내가, 제일 먼저 공항을 떠났다. 

   5일동안 즐겁게 여행한 사이여서 조금 섭섭했지만, 서로에게 ‘즐거운 시간이었고 무사히 집으로 가라.’는 간단한 인사만을 나누었다. 어느 누구도 혹시 다음에 만날 수 있으니까, 연락처를 교환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인생을 많이 살아본 60대 전후의 사람들이다 보니까, 서로 다시 만나기 어려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의 연락처를 나누는 행동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같이 있을 때는 즐겁게 지내다가, 헤어질 때는 깔끔하게 헤어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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