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 신문에 기고한 일곱번째 글
W구단은 K구단과의 경기에서 7회까지 6대 4로 끌려가고 있었다. 2019년 5월 어느 날 이었다. 하지만 8회초 K구단의 불펜투수들이 흔들리면서, 2사 만루를 만들었다. K구단은 이 위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마무리투수인 심진식투수를 등판시켰다. 그러자 W구단 김강혁감독은 얼마 전 K구단에서 이적해온 장용식선수를 대타로 기용하였다. 장용식선수가 최근 타격감도 좋지만, K구단에서 같이 훈련을 해온 심진식투수의 공을 잘 알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용식선수는 ‘욕심내지 말고, 정확하게만 타격하자.’고 되뇌면서 타석에 들어섰다. 심진식선수가 주로 직구와 포크볼을 던진다는 것을 알고 있던 장용식선수는, 직구만을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2개의 유인구성 포크볼에는 미동도 하지 않다가, 드디어 3구째로 들어오는 직구를 받아 쳤다. 베이스에 있던 3명의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3루타가 되었다. 그렇게 장용식선수는 이날 경기의 영웅이 되었다.
장용식선수는 K구단의 어느 선수보다 열심히 운동을 했다. 빨리 1군에서 뛰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30살의 선수가 퇴출되지 않으려면, 1군에서 성적을 만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2018시즌 퓨처스리그(2군) 올스타 선수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노력한 만큼, 1군에서도 활약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1군에서 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시즌 내내 1군에서 겨우 13타석만 들어설 수 있었다. 그만큼 K구단의 외야는 타 구단에 비해 경쟁이 심했다. 장용식선수의 나이를 감안하면, 2019시즌에도 K구단에서 1군으로 등록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구단은 한살이라도 젊은 선수가 성장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盡人事 待天命’이라고 했던가! 그 동안 야구를 그만두어야만 할 만큼, 수많은 좌절의 시기를 헤쳐나온 장용식선수 아닌가!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만이 장용식선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11월 어느 날 한참 훈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 K구단의 서상철 운영팀장이 장용식선수를 불렀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서상철팀장이 자신을 따로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운영팀장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서팀장의 얼굴은 자못 심각한 모습이었다.
“장용식선수, 금년 시즌에 맘 고생이 심했지? 단장님과 감독님이 상의해서, 장선수를 W구단에 무상으로 트레이드 하기로 했어. 순수하게 장선수의 앞날을 위해서 한 결정이야. K구단보다는 W구단의 외야 선수 층이 얇아서 기회가 많을 거야.”
서팀장은 평상시에도 제일 열심히 훈련을 하는 장용식선수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30살이라는 나이를 감안하면, 1군에서 빨리 자리잡아야 프로야구계에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K구단의 윤경만단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장용식선수가 1군에서 뛸 기회가 많은 W구단에 보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트레이드 통보를 받은 장용식선수는 당황스러웠다. 슬퍼해야 할 지, 아니면 좋아해야 할 지... 문득 야구선수로서 고생스러웠던 지난 날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대학교 4학년때 오른쪽 발목 인대가 끊어지면서, 프로야구 지명을 받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이어서, 대학교 졸업 후에도 지명을 못 받은 것이다. 하지만 장용식선수는 좋아하는 야구를 그만둘 수 없어서, 일산에 있는 독립구단에서 뛰었다.
장용식선수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른발의 부상이 재발하면서 야구를 그만두어야만 했다. 이후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하면서, 가난한 집안 형편상 아르바이트를 겸할 수밖에 없었다. 우유 배달, 신문 배달, 피자 배달, 중국집 주방일, 심지어는 술집 웨이터까지.
어쩔 수 없이 야구를 그만두었지만, 야구에 대한 자신의 꿈은 접을 수 없었다. 사회복무요원을 마친 뒤에, K구단에 육성선수로 입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1군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잡기는 어려웠다. 육성선수로 3년이 지난 2017년 1군 주전 외야수였던 이강석선수가 부상을 입으면서, 1군 경기장을 처음으로 밟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나이가 29살이었다. 1군에 올라가지 못하는 선수들은 방출대상이 되는 나이였다. 방출되기 직전에 겨우 구제된 것이다.
W구단에 온 장용식선수는 이곳에서 반드시 살아남으리라고 다짐해본다. W구단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진짜 야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용식선수는 부모님을 비롯해서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귀고 있는 애인도 빨리 결혼을 하자고 재촉했다. 절박감이 장용식선수에게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인가? 2019시즌이 시작되고 한달이 지난 어느 날, 주전 외야수인 정백현선수가 부상을 당해서 빈 자리가 생겼다. 장용식선수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정백현선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장용식선수는 좋은 선구안으로 높은 출루율을 올리면서, 득점의 발판을 만드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렇게 장용식선수는 W구단의 1군 외야수로 자리를 잡아갔다. 3할에 가까운 타율과 많은 볼넷을 끌어내면서 W구단의 공격력에 큰 기여를 하였다.
W구단으로 트레이드 되기 전에, 나는 2군 훈련장을 방문할 때마다 열심히 훈련하는 장용식선수를 발견하곤 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일찍 나와서 훈련을 시작하고, 제일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끊임없이 한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왜 장용식선수같이 열심히 하는 선수가, 1군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그렇게 많이 필요할까? 프로구단에 입단한지 불과 1~2년된 선수들 중에서 1군에서 좋은 성적을 만들어내는 선수들도 있는데. 1군에 콜업되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도 육성의 한 성공요소이기 때문에,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육성팀장을 비롯한 부서장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선수를 잘 육성한다는 것은 1군에서 오래 활약할 수 있는 선수를, 가능한 짧은 기간에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그렇다면 선수를 이렇게 육성시킬 수 있는 요인이 무엇일까?”
그러자 부서장들은 여러 가지 성공 요소를 끄집어냈다. 타고난 재질, 꾸준한 노력, 뛰어난 코칭스태프, 구단의 체계적인 육성시스템 등.. 그 중에서도 타고난 재질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유명한 미국 프로야구단의 육성시스템에 대해 서술한 책을 본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모든 구단의 1군 선수들 중에서 평균적으로 20~30%가 소위 ‘S’나 ‘A’급 선수이고, 70~80%가 ‘B’급 선수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S’나 ‘A’급 선수들의 승리 기여도가 높기 때문에, 팬뿐 아니라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모두 이 선수들을 주목한다. 그리고 이 선수들은 대부분 아마추어 시절에도 좋은 기량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이 경쟁에서 유리하기는 하겠지만,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아마야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가, 정작 프로무대에서는 1군에도 오르지 못하고 방출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반대로 아마야구에서는 두드러진 선수가 아니었지만, 프로무대에서는 1군 주전선수로 활약하는 선수들도 많다.
‘一切唯心造’라고 했던가! 선수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훈련에 임하느냐가 선수들의 성공여부를 판가름한다고 할 수 있다. 노력에 따라서 ‘S’, ‘A’급이 될 수 있고, ‘B’급에 머무르거나 방출될 수도 있다. 그래서 선수들이 강한 열망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성공적인 육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장용식선수가 W구단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바로 ‘기회’이다. 경기에 자주 나갈 수 있는 기회, 1군에서 뛸 수 있는 기회.
KBO 각 구단에는 평균 90명 내외의 선수들이 있다. 이들에게 모두 경기에 뛸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는 없다. 하지만 경기에 나갈 수 있을 만큼의 기량을 갖춘 선수에게는, 자기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서 구단에서는 기량을 갖춘 선수를 골라내기 위한 ‘공정한 평가기준’이 필요하다. ‘공정한 평가기준’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잡기 위한 ‘건전한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뼈대가 된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코치나 선수들이 인정할 수 있는 선수들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그리고 구단간에는 트레이드 같은 제도를 이용해서,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국제대회에서 연이은 패배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프로야구의 앞날에 대해 걱정이 된다. 더군다나 야구를 지망하는 어린 선수들이 줄어들고 있어서, 우리나라 야구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아 보인다. 새로운 아마야구 선수를 발굴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기존 프로야구 선수들이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로야구의 본질적인 경쟁력은,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는 경기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야구를 좋아하는 아마야구 선수들도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