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을 볼 수 없다는 것
“최악의 경우 실명할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겠다 마음먹고 병원에 왔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하필이면 전이된 종양이 시신경과 매우 가까이 붙어있어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것 봐라. 안 쓰러지네? 그래 네가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세상이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링 위에 내던져진 나는 가드를 올리고 필사적으로 공격을 피해 보지만 계속해서 세상이 날리는 치명타를 피하지 못했다. 나는 훈련이 덜 된 볼품없는 선수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암 판정을 받은 것보다 더욱 잔인한 상황이 올 것이라 예상치 못했던 터라 정말이지 마음이 복잡했다. 슬픔의 변곡점은 이미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부작용도 아닌 실명이라는 부작용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 단어가 가진 무게는 나를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명할 수 있다는 의료진의 말에 그저 눈물밖엔 나오지 않았다. 종양은 뇌하수체와 뇌의 시신경 근처로 전이되어 있었다. 뇌하수체는 제거해야 하며 이 경우 내분비내과를 다니며 평생 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시신경 근처에 있는 종양이었다. 마치 눈사람 모양처럼 생긴 나란히 위치한 두 개의 동그란 종양은 아버지의 시신경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의 몸속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종양 씨앗을 뿌린 것도 정말이지 화가 나는데 뇌로 가서 그것도 시신경 근처에 혈관을 내리고 자리 잡다니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시신경과 매우 가까워 감마나이프 시술은 불가하고 전뇌 방사선을 30회 시행하여 뇌전이 종양을 제거한다고 하였다. 최대한 안전하게 하겠지만 시신경과 가까워 위험한 상태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아버지의 진료과가 늘어났다. 방사선종양학과와 신경외과 진료가 잡혔고 신경외과 수술이 끝나면 내분비내과 진료가 함께 잡힐 터였다.
아버지가 암 확진을 받은 지 이제 막 1년이 지난 12월의 추운 겨울날, 그렇게 아버지의 입원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6인실에 입원을 했고 어느 공동체 생활이 그러하듯 우리는 크고 작은 불편함과 마주하게 되었다. 병원 다인실의 공기는 상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환자의 체취와 온갖 약품들의 냄새 그리고 환자 개개인이 먹는 각종 음식 냄새가 한 군데 얽혀 특유의 향을 만들어내었다. 겨울 같은 경우는 그나마 있는 창문도 열기 어려워 건물 환기시스템에만 의존해야 하고 행여 옆자리 환자가 기저귀에 대변이라도 보는 날이면 병실에 있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냄새도 그렇지만 병실은 건강한 사람도 아프게 만들 정도로 좁고 답답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은 흰 바탕에 주황색과 하늘색 격자무늬가 들어간 커튼이 두르고 있는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전부였다. 감청색의 인조가죽으로 덮인 보호자 간이침대는 딱딱하고 몹시 불편했다. 낡은 부분으로 튀어나온 누런 스펀지가 보이지 않았더라면 쿠션 역할을 하는 보충재가 들어있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어머니는 집에서 요가 매트를 가지고 와 그 위에 깔아 두었다. 허리와 골반에 전해지는 불편함이 한결 나아졌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밤에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암 병동에는 밤이 찾아오지 않는다. 새벽에도 진통제를 찾는 환자들의 신음 소리와 화장실 너머 들려오는 구토 소리, 누군가의 가래를 제거하며 큰 소리로 돌아가는 모터 소리 등으로 잠을 이루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찾아오지 않는 밤을 기다리는 것보다 양 귀에 이어폰을 꽂고 새벽을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6인실은 이렇게 크고 작은 불편한 점이 많았으나 그것은 타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 나오는 소위 VIP가 아니었다. 1인실 병실료는 100만 원에 육박했고 우리 가계는 그런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의 입원 기간은 짧은 경우 2주, 긴 경우 두 달에 달했는데 이 기간을 모두 1인실에서 보냈다고 생각하면 단순 어림해보아도 정말 억 소리가 나온다. 창가 자리에 배정받는 운을 기대해야 하는 다인실과 달리 병상 옆 창 너머로 한강이 보이는 독립된 공간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면 한없이 좋겠지만 현실의 투병 생활은 드라마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날은 아버지의 뇌하수체 제거 수술을 앞둔 12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답답한 병실을 나와 밖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주말의 대학병원은 평일과는 달리 고요하고 한산하다. 가끔 우리처럼 답답한 병실을 떠나 홀로 링거를 주렁주렁 매단 채 복도를 거니는 환자나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앉은 채 복도를 오가는 환자 몇몇을 마주할 뿐이었다. 밤새 눈이 내려 키가 작은 건물의 옥상 곳곳이 하얀 눈밭으로 변해있었다. 밖은 바람이 꽤 부는지 병원 로비 옥상에서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고 나무들은 그런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며 밤새 맞은 눈을 털어내고 있었다. 굳게 닫힌 창문 너머로 스산하고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나는 양팔을 교차해 팔뚝을 어루만지며 추위를 달랬다. 우리는 아무런 말없이 한참 밖을 바라보았다. 병원 바로 옆에 위치한 대로변을 통과하는 수많은 차들이 빨간불에 멈춰 서며 뒤꽁무니에서 다 같이 빨간 불빛을 연이어 뿜어대고 그런 자동차 배기구에서 나오는 희뿌연 수증기 따위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도로에서 시선을 옮기면 벌거벗은 나무 위로 내린 하얀 눈꽃들이 보였다. 이 겨울이 가면 눈꽃은 녹고 벌거벗은 나무 위로 생명이 고이겠지. 어떤 나무는 꽃망울을 터트리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꽃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푸르른 녹음으로 그를 치장하겠지. 그런 봄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봄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래서 두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봄이 피워낸 미호한 꽃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내게 절망이었다.